피리 부는 눈먼 사나이가 있었다.
그의 피리 부는 솜씨는 아무도 흉내낼 수 없으리 만큼 뛰어난 것이어서
고울 안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정작 그가 부는 피리 소리를 들어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
왜냐하면 그런 대단한 명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여간해서는
많은 사람 앞에서 피리를 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명성이 하도 높았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사람을 보내어
초대하였지만 , 웬일인지 그는 그 어떤 초대에도 응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매우 아름다운 아내가 있었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운 여인이 그의 아내가 되었는지,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의 아내는 겨우 열여섯 살이나 되었을까, 그러니까 소녀라고
불러도 좋을 어린 나이였다.
그에 비해서 피리 부는 사나이의 나이는 짐작컨대 쉰 살이
넘었음직하였다.
그는 거의 손녀 같은 아내와 살고 있었던 것이다.
이들 부부는 매우 가난하였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남편은 장님이어서 일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를 가엾게 여긴 이웃사람들이 가끔씩 그에게 감자라든가 수수,조 같은
것들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그것으로 근근이 연명을 하고 있었고, 남 몰래 혼자서 피리부는 일에만
열중할 뿐이었다.

"에이그,참 딱하기도 허우!"
그 사나이와 친분이 있는 노파가 그에게 하는 말이었다.
"글쎄,그게 무슨 고집이우? 여기저기서 초대를 해도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면서 이 고생이라니, 원! 초대를 받아 가면 어디 빈손으로야
보낼라구!"
그러면 사나이는 빙그레 웃는 것이었다.
그 웃음은 세상의 모든 시름을 다 지워버린 듯한, 어쩌면 백치와도
같은 그런 웃음이었다.
그래서 그가 그렇게 무심히 웃는 모습을 보고 나면 온갖 푸념을
해대던 노파도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이고 심정이 서글퍼져서
더 이상 그를  구박할 수 없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이웃 사람들의 도움만으로 살아가기는 어려운
일이었으므로 그의 아내가 벌이를 해오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래서 어린 그의 아내는 시간이 나는 대로 남의 집 품을 팔기도 하고.
심지어는 구걸을 해오기도 하였다.

"저이들은 참 이상한 부부야.  나이 많은 남편에 갓 열여섯 살 난 새악시라니!
게다가 인물을 좀 봐요. 영감은 그야말로 쭈그렁망태가 다 돼가는데,
색시는 양귀비 빰치게 곱지 않우?"
"그러게 말예요. 참 알 수 없는 부부라니깐요!  그러면서 군소리 하나
않고 품을 팔고 구걸까지 해가면서 남편을 봉양하다니 저 색시도
보통은 아니지요."
그의 아내는 제비처럼 날렵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그녀가 걷는 모습은 가볍고 날씬했으며, 발걸음은 용수철이라도 달린 듯 탄력이 있었다.
그녀가 걸어가는 모습은 흡사 어린 암노루가 뛰는 듯, 아름다운 새가
사뿐사뿐  지상에 걸어가며 깃을 치는 듯이 보였다.
그녀는 가난했기 때문에 비단 옷이라든가 비싼 장신구 따위로 몸치장에
신경을 쓸 겨를이 물론 없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언제나 종달새 처럼 명랑했다.
그녀는 언제나 생기에 넘쳐 있었고, 즐거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희고 맑았으며, 그녀의 눈빛은 늘 꿈꾸듯 아련했다.
그녀의 아름다움이 워낙 눈부셨기 때문에 누구든지 그녀를
한번만이라도 보면 두 눈이 휘둥그래지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녀는 자신의 남편을 너무나도 사랑하고 있었다.

사람들이 넌지시 의중을 떠보느라고 그녀의 남편에 대해 험담이라도
하려 들면 그녀의 눈빛은 대번에 흐려지게 마련이었다.
그리고는 금방 두 눈에 눈물이 그렁그렁 고이면서 매우 애처로운
표정이 되곤 하였다.
그런 그녀의 모습이 또한 너무나 슬프고 아름다웠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음부터는 아예 그녀를 짖굿게 시험해보는
따위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녀는 자신의 늙은 남편을 아버지나 오라버니처럼 사랑하고 또
존경하였다.
그녀는 아예 다른 남자라고는 몰랐다.
그녀에게는 남자란 오로지 자기의 남편이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 점은 피리 부는 사나이 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부부는 저녁식사를 마치고 나면 언제나 마주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오늘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아내는 오늘 품팔이를 하다가 아무게 엄마가 당신의 험담을 하려
하는데 너무나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 없었다는 따위의 이야기를,
또 남들은 자기더러 부부 사이 치곤 너무나 나이 차이가 많이 난다고
하지만 부부라고 해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면 왜 안되는지 알 수 없다든가,
우연히 길을 가다가 마주친 어떤 젊은이가 자기를 뚫어져라 쳐다보는데
갑자기 얼굴이 달아오르며 가슴이 뛰고 겁이 나서 얼른 눈에 띄는 집
대문을 밀고 들어갔었다는 이야기도 하였다.
그럴때면 남편은 아무 말없이 그녀의 손을 꼬옥 쥐어주곤 하였다.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가 나가 있는 동안, 오늘은 어떤 곡을 연습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젠 무슨무슨 곡은 다 마쳤고, 새로이 무슨무슨 곡을 시작했다든지,또는
갑자기 악상이 떠올라서 작곡을 하나 마쳤다든지 하는...........
그러노라면 아내는 남편에게 오늘 연습한 곡을 좀 들려달라고
청하는 것이었다.
그 맑고 애정어린 눈을 빛내면서......물론 그녀의 남편은 장님이었기 때문에
아내의 매력적인 눈빛을 알리 없었지만..........
그러면 사나이는 자신의 소중한 보물인 피리를 품에서 꺼내었다.
그는 이 피리를 단 한번도 몸에서 놓아 본 적이 없엇다.

사나이는 천으로 정성스럽게 피리를 닦은 다음 조용히 명상에 잠겨 들었다.
그는 아주 어렸을 적에 어떤 스승으로부터 이 명상법을 배운 것이라고 했다.
시간이 흐르고 명상이 깊어짐에 따라 그의 표정은 조금씩 바뀌게 마련이었다.
예컨데 아주 구슬픈 곡조를 연주하려 할 때에는 그의 표정도 처연하게 바뀌었다.
그런가 하면 장중한 곡조일 때는 당당하게, 서정적인  곡일 때에는
봄바람처럼 부드럽게 그의 표정은 바뀌었다.
이윽고 그 깊은 명상에서 깨어나 그는 가만히 피리를 잡고 가락을 불기 시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참으로 신묘하기 그지없는 솜씨였다.

그의 피리 소리가 낭랑하게 울려퍼지는 동안 그곳은 이제 흙벽 바른 좁은 방이 아니었다.
때로는 검은 절벽에 성난 파도가 밀려와서 부딪쳐 깨어지는 해변으로,
또 때로는 맑은 솔바람이 이는 깊고 깊은 산사로,
그런가 하면 하얀 백조때가 구름처럼 날아내리는 외딴 섬으로........
그렇게 그의 피리 소리는 그와 그의 아내의 마음을 이끌어갔다.
그의 피리 소리는 이 세상 모든 것을 다 이 작은 방안으로 끌어올수 있었다.
사랑,이별,슬픔,기쁨,명랑함,경쾌함,배신, 분노,한,처연함......
그의 그런 천재적인 노랫가락에 흠뻑 취한 다음 깨어나보면
이미 자정이 지났기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면 그의 아내는 눈먼 남편의 어깨와 손가락을 어루만져주고,
방금까지도 온갖 조화를 불어내던 그의 입술에
 꽃잎처럼 부드러운
자기의 입술을 지그시 가져다 대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은 자신들의 처지에 한 번 눈물을 흘리고,
또 음악에 감동하여 두 번 눈물을 흘리며 서로 부등켜안고 꼬박 밤을
새기가 일쑤였다.

"여보,너무나 미안하구려...." 하고 사나이는 아내에게 말하곤했다.
"많은 사람들이 당신을 두고 선녀처럼 곱다고 말하는 것을 나는 알고 있소.
그렇지만 난 눈으로 그런 당신의 모습을 볼 수가 없구려.
뿐만 아니라 당신의 고운 모습을 품팔이까지 시켜서 다 망가뜨리고 있으니,
당신은 내가 원망스럽지도 않소?"
사나이가 이렇게 말할 때마다 그의 아내는 얼른 남편의 입을 손으로 막아서
더 이상 그런 말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말씀일랑 마셔요. 나는 당신의 아름다운 피리 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모든 아픔과 슬픔이 깨끗이 씻어지고, 새로운 힘이 솟는걸요!"
"고맙소.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내 피리 소리를 그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는 거라오.
나는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서 피리를 불겠소.
그것만이 나의 단 한 가지 소원이라오. 내가 당신에게 줄 거라곤 그것밖에
없으니....."
그러면서 그는 덧붙이는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싫어질 땐 언제든지 떠나도 좋소.
단지 떠날 때는 내게 떠난다고 이야기라도 해주었으면 하고 바랄 뿐이오."


그렇게 세월이 흘러갔다.
그러는 사이에 나라 안에는 흉년이 계속되어 이들 부부의 가난은
더욱 극심해졌고, 마침내 이들은 같이 구걸에 나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들은 거지가 된 것이다.
그들은 이 마을 저 마을 떠돌면서 구걸을 하여 연명하였다.
그러다 보니 차츰 사나이는 피리를 불고 아내는 그 가락에 맞추어 춤을 춰서
구경꾼들로부터 돈을 받는 식으로 구걸하는 방식도 바뀌어갔다.
그러나 사나이는 아내만을 위해 불던 황홀하고 신비로운 음률만은 아껴두고
결코 그런 자리에서는 불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런 음률을 아무에게나 들려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그의 아내에 대한 사랑의 자존심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저 보통의 실력만으로도 그의 피리 소리는 놀라웠다.
따라서 이들이 피리를 불고 춤을 추는 곳에는 사람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사나이의 피리 부는 솜씨가 더없이 탁월한 데다가
그의 아내가 추는 춤 솜씨 또한 아름답고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사나이는 보통 슬프고 처연한 가락을 잘 불었다.
그러면 그의 아내는 맑고 고운 눈에 슬픔을 그렁그렁 담고서 보는 사람의 가슴이
에이는 듯한 감흥을 자아내는 춤을 추었다.
마치 가을 바람이 나뭇잎을 휘몰아 구르는 듯한 비창한 피리 소리와 가냘픈
여인의 떨리는 애틋한 춤사위........
사람들은 넋을 잃을 듯이 그들의 공연을 지켜 보았고,
그중에는 약간의 돈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 부부는 그런 돈으로 근근이 연명을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그들 부부는 하루의 공연을 마치고 피곤한 몸을 일으켜 잠잘 데로
돌아가려고 짐을 챙기는 중이었다.
짐이래야 피리 하나와 멍석 한 장이 고작이었지만.
그때 빨간 모자를 쓴 사나이 한 명이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려는듯
주위를 두리번두리번 살피며 다가와서 아내에게 말했다.
"잠깐 나를 따라와 주시겠습니까?"
아내는 고개를 저었다.
"무슨 일이신지 모르겠지만 나는 남편을 돌봐주어야 한답니다."
"정말 저를 안 따라가시겠습니까?"
"예, 제가 떠난다면 남편을 돌봐줄 사람이 없어서요."
"알겠습니다."
빨간 모자의 사나이는 순순히 되돌아갔다.
그날 밤 피리 부는 사내는 여느 때보다 매우 우울해 보였다.
무슨 예감이 든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내는 아내대로 여느 때보다 매우 들떠 있었다.
남편은 아내의 그런 기분을 짐작했는지, 또는 자기의 마음을 달래려는 것이었는지
가만히 피리를 꺼내 불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그 피리 소리는 그의 아내의 마음을 녹여서 이튿날 아침, 두 사람이
잠에서 깨었을 때는 전과 다름없는 기분이 되었다.
그런데 그날 저녁에 그 이상한 빨간 모자의 사내가 또 나타났다.
"잠깐 나를 따라와 주십시오."
"오늘도 또 오셨군요. 안된다고 어제 잘 말씀드렸을텐데요."
아내는 가슴이 뛰었지만 침착하게 말했다.
"그래서 오늘은 당신에게 선물을 하나 가져왔습니다."
빨간 모자의 사내는 진흥빛 아름다운 장식이 달린 거울을 아내에게
건네주었다.
아내가 물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나를 데려가려는 거지요?"
"그건 나도 모릅니다. 나는 그저 심부름꾼일 뿐이니까요.
저의 주인께서 절 보내셨습니다."
"당신의 주인이 누구입니까?"
"우리 주인은 바로 이 성의 성주이십니다."
남편인 피리 부는 사나이는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면서 매우
어두운 표정이 되었다.
이윽고 그가 말했다.
"여보, 그 사람을 따라가선 안되오.
그 사람을 따라간다면 당신과 나는 틀림없이 슬픈 일을 만나게 될 것만 같구려."
선물을 받아 가슴이 설렌 아내는 왠지 모르게 성주를 만나고 싶어졌지만,
남편의 슬픈 애원에 마음이 꺾였다.
"아무리 성주님의 부름이라고 해도 나는 당신을 따라갈 수가 없어요.
보시다시피 저희 남편께서 너무나 슬퍼하시니까요."
그러자 그 사나이는 순순히 물러갔다.
그날 밤에도 남편의 우울과 아내의 설렘이 있었다.
남편은 있는 비법을 다하여 아름다운 가락을 연주하였다.
그리고 남편은 그 연주때문에 기진맥진했다.
그러나 다행하게도 그의 아름다운 피리 소리는 아내의 마음을 전의 선량하고
순진했던 상태로 되돌려 놓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둘은 여느 날처럼 공연을 할 수 있었으나,
저녁에 또다시 빨간 모자의 사내가 나타났다.
사내가 다시 말했다.
"잠깐이면 됩니다.
나를 따라와 주십시오. 여기에 네 마리의 흰말이 끄는 황금마차와
네 명의 시종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당신이 나를 따라와 주기만 한다면 성주님은
수많은 나무와 잔디와 호수가 있는 멋진 정원이 딸린,
매일같이 깨끗한 물로 목욕을 할 수 있는 좋은 집을 선물할
예정입니다."
아내는 깨끗하고 멋진 말들이 끄는 마차와 깍듯이 자기에게
예를 차리는 시종들을 보고 이 사나이의 말이 진짜라고 생각하고는
이 사나이를 따라가고 싶어졌다.
게다가 그녀는 어제 선물받은 거울에 자기의 얼굴을 비추어보고는
자기가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여자인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어
가슴이 설레어 있었고,
그래서 차츰 자만심이 싹트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남편을 달래었다.
"여보,잠깐이면 된다잖아요? 그리고 성주님이 주시는 모든 선물은 다 내 것이면서
또 당신 것이기도 하잖아요?"
그러자 피리 부는 사내가 슬픈 목소리로 물었다.
"여보, 당신은 이제 이런 생활에 지친 것이 아니오?"
"아녜요. 그렇지만 이런 호의를 일부러 거절할 것 까지는 없잖겠어요?"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난 왠지 슬프고 두렵구려."
남편이 너무나 불안해 하고 슬퍼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아내는 말했다.
"역시 안되겠어요. 제 남편은 세상에서 의지할 사람이라곤 나밖에 없으니까요."
그러자 그 사나이는 다시 순순히 물러갔다.
그리고 그날 저녁에도 남편은 혼신의 힘을 다해 아내의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는
신비로운 가락을 불었다.
이번에도 사내는 아내의 마음을 녹일 수가 있었다.
그러자 남편은 이제 거의 모든 힘을 다 탕진한 듯했다.
그는 하룻밤 사이에 핼쓱하게 병색이 완연해져서 나이보다 십년은 더 늙어 보였다.
그리고 이튿날 저녁 무렵이 되었다.
빨간 모자의 사나이가 찾아 주었던 그 시간이 되었지만 이젠 그 사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자 아내는 왠지 모르게 허전했다.
이런 허전함은 그녀로서는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아내는 생각했다.
" 아, 나는 왜 이다지도 힘든 운명을 타고났을까!"
사실 그런 탄식을 한 그녀가 잘못이랄 수는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고생하기보다는 편한 생활을 더 좋아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아내의 마음이 쓸쓸하게 지쳐 있을 때 저쪽에서 말방울소리
가 들리면서 수많은 부하들을 거느린 성주가 나타났다. 아내는 대번
에 그가 바로 자기를 몇 번이나 불렀던 성주라는 것을 알아챘다.
 가까이 온 성주가 그녀에게 말했다.
 "그대여, 나를 따라 나의 성궁으로 가지 않겠느냐? 나는 그대의
아름다운 모습과 날렵한 춤 솜씨를 한번 본 이래로 그대가 아니면
다른 어떤 여인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굳게 맹세하였다. 그러므로
그대는 나의 아내가 되어야 한다. 자, 이제 나를 따라 성궁으로 가자."
 "성주님, 저의 남편이 너무나 ……."
 그러나 이젠 그녀의 의견이 존중되지도 않았거니와, 그녀로서도
남편을 위하는 마음이 현저하게 약화되어 있었다. 결국 그녀는 성주
의 옆자리에 앉아 수많은 호위병에 둘러싸여 성궁으로 들어가고 말았
다.

 피리 부는 사내의 가슴은 커다란 돌덩이 하나가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사내는 아무 말도 못하고 멍하게 있다가 꺼억꺼억 울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 시간을 울고 나더니, 그는 갑자기 명상의 자세로
앉았다.
 이윽고 밤이 깊었다. 칠흑 같은 밤이었다. 지금쯤 그의 어린 아내는
어쩌면 옥으로 된 목욕탕에서 뜨거운 목욕물로 목욕을 하고 비단옷으
로 갈아입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 문제야 어찌 됐든
그는 마침내 깊고 깊은 명상에서 깨어났고, 그의 얼굴에서는 가느다
란 미소가 흘렀다.
 사내는 품속에서 피리를 꺼내었다. 사내는 중얼거렸다.
 '아내는 갔어도 피리만은 남았으니…….'
 그는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그는 피리소리는 이렇게 노래 부르는
것 같았다.

 오, 이 피리는 나의 모든 것이라오.
 음악은 나의 깊은 진실이라오.
 나는 여기 스승으로부터 배운 명상의 피리를 부노니
 내겐 이제 여인이 필요치 않다오.
 여자, 어디에 사랑할 것이 있느냐.
 여자, 어디에 사랑할 것이 있느냐.

 그런데 그날 밤 그의 아내, 이제는 성주의 아내가 되려는 그녀
또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녀의 귓전에 남편이
부는 애처로운 가락이 들려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 가락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눈먼 남편을 두고 호사스러운 침대에 누워 있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
부끄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내는 그 피리소리가 나는 곳으로
곧장 뛰어나가려 했다. 그러나 시종들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만약을
위해 성주는 시종들로 하여금 그녀를 지키도록 조치를 해놓았기 때문
이었다.
 이튿날 두 눈이 퉁퉁 부운 그녀를 보고 성주는 의아하게 여겨 그
까닭을 물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나는 남편에게 돌아가지 않음 안돼요. 나를 내보내 주세요."
 성주는 불같이 화를 내고는 시종 숫자를 백 명으로 늘려 그녀를
감시하도록 하고, 한편으로 부하들에게 그 피리 부는 사내를 잡아오
라고 일렀다. 성주는 그를 처형해 버릴 셈이었다.
 성주의 명령에 따라 피리 부는 사내가 잡혀 왔다. 사내는 아무
죄도 없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표정에는 아무런 두려
움이 없어 보였다.
 그날 밤 보름달이 떠올랐을 때 피리 부는 사나이는 품속에서 피리
를 꺼내어 아주 슬프고도 애절한 가락을 불기 시작했다. 그 가락은
이렇게 노래하는 것 같았다.

 노래가 한 번 대기를 울리면
 그 음률은 허공에 흡수되어 버린다네.
 그렇게 사라져 버린 그 음률은
 잡을 수도 되찾을 수도 없다네.
 모든 것은 그렇게
 우리들의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느니
 나는 그 아무 것도 원치 않는다네
 나는 그 아무 것에도 집착하지 않으려네.

 그 피리 소리는 지극히 맑고 투명하여 마치 옥이 구르는 것과도
같았다. 그것은 그의 탁월한 솜씨로도 아직까지 내지 못했던 아주
깊고 오묘한 가락이었으며, 파고드는 영원과 무한의 절창(絶唱)에
넋을 잃었다. 그리고 피리 부는 사나이는 유유하게 감옥을 벗어나
버렸다.
 이튿날 성주는 다시 사람들을 보내어 그 사나이를 붙잡으려고 하였
다. 그러나 그것은 허사였다. 사나이는 예의 그 '얽매이지 않음'의
가락을 불었고, 이상하게도 그 피리 소리를 듣자 아무도 그 사나이의
근처에는 다가갈 수가 없었다. 흡사 그 사나이의 주위에 그 '무집착의
음악'이 달무리처럼 둘러쳐져 사나이를 보호하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런 보고를 받자 성주는 불같이 화를 내면서 어떻게든 그 사나이
를 체포해 오라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의 부하들은 성주의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성주의 급한 성격으로 보아 그 사나이를
체포해 오지 못한다면 그들은 결국 무서운 벌을 받을 수밖에 없을
게 분명하였다.

 "부인께서 그 비법을 아실 거야."
 누군가가 말했다. 그러자 모두들 소리쳤다.
 "그래! 그 사나이의 비밀을 부인보다 더 잘 알 사람은 없지!"
 그래서 병사들은 성주의 부인―그러니까 예전 치리 부는 사나이
의 아내―에게 달렸다.
 "도저히 그를 체포할 수가 없습니다. 부인께서는 그 비법을 아실테
니 저희들을 위해 그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러나 그녀는 눈물을 주루룩 흘리며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
지만 그녀가 그를 체포할 방법이 아예 없다고 잘라 말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 그녀가 눈물만 흘리는 것을 본 호위대장은 그녀에게 피리
부는 사내를 체포할 수 있는 비법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는
말했다.

 "좋습니다. 어차피 저희들은 그 사내를 체포하지 못하면 죽을 목숨
이니 여기서 죽도록 하겠습니다."하고는 곧 단검을 꺼내어 자신의
배를 찔렀다. 호위대장의 배에서 붉은 피가 좌악 쏟아졌다.
 그러자 놀란 그녀는 소리쳤다.
 "그만들 둬요! 귀를 막고 가면 되니까요!"
 하지만 호위대장이 자기 배를 찌른 것은 속임수였다. 그는 자기의
옷 속에 짐슴의 피를 담은 자루 부대를 넣어가지고 가서 거짓으로
배를 찌르는 척하고 그 가죽부대를 찔러 그녀를 속인 것이었다.
 벌떡 일어난 호위대장이 소리쳤다.
 "됐다! 모두들 귀마개를 하고 접근하라!"
 아닌 게 아니라 귀를 틀어막자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 소리는
들리지 않아서 그를 사로잡을 수가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사나이는
노래했다.

 나는 모든 것을 버렸거니
 나는 쥐었던 속은 펴고 모든 것을 놓았거니
 창과 칼은 내 몸을 찌를지라도
 그것들이 내 음률에 흠을 내진 못하리.
 그대들이 내 마음에 상처를 내진 못하리.

 그러자 그때 천상으로부터 아름다운 음악이 은은히 흘러내려오기
시작했다. 그 소리는 귀를 막은 병사들로서도 듣지 않을 수 없는
신비한 음률이었다. 많은 병사들이 그 음률의 아름다움에 취해 있는
사이에 사나이는 그 장소에서 그림자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렸다.
 그로부터 많은 날들이 지났다. 성주는 이미 죽었고, 그의 아들이
새 성주가 되었다. 피리 부는 사나이의 아내는 이제 성주의 어머니였
다

 그러나 세월이 갈수록 그녀는 불쌍한 옛남편을 만나고 싶어했으
며, 그의 피리 소리를 듣고 싶어 목말라 했다. 성주에게로 온 이래로
그녀에게 행복은 없었다. 그녀는 좋은 집에서 값비싼 옷을 입고 기름
진 음식을 먹었으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칭송과 찬사를 받으며 살게
되었지만 마음 한구석에는 언제나 회한과 아픔이 남아 있었다.

 '아, 그때가 내겐 가장 행복했었어!' 하고 그녀는 중얼거리곤 하였
다.

 그녀는 너무나도 옛남편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단 한번이라도
그가 부는 피리 소리를 다시 한번 듣기를 원했다.
 '아, 단 한번만이라도! 단 한번만이라도!'
 그녀는 단 한번만이라도 옛남편을 만나서 자기의 배신을 사죄하고
싶었다. 그만큼 세월이 흘렀으니 어쩌면 이제 그녀의 옛남편이었던
피리 부는 사나이는 벌써 죽어서 이 세상 사람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래도 혹시나…….'
 그래서 그녀는 피리를 가장 잘 부는 사람을 뽑기 위한 대회를 열어
달라고 새 성주가 된 아들에게 부탁을 했다. 혹시 옛남편이 그 대회
에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기대하면서.
 그래서 곧 피리 부는 경연대회가 대대적으로 열렸다. 그러나 헛일
이었다. 그녀의 옛남편은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녀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해마다 대회를 열었다.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녀의 옛남
편은 여전히 그 대회에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회한에 눈물짓는
그녀의 가슴엔 피멍이 지기 시작했다.
 그녀의 모습은 초췌하여 흡사 십 년이나 앓은 사람처럼 변했다.
이미 그녀는, 꽃 같고 순진하고 날렵하던 예전의 그녀가 아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이었다.
 금년의 대회도 성과없이 끝난 며칠 뒤, 그녀는 남편이 예전 자기에
게만 들려주었던 신비한 가락이 울려퍼지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얼마나 그리워한 음률이던가! 그녀는 부리나케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달려가 보았다. 거기에는 이국적인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호숫가 나무밑에 꿈꾸듯 다소곳이 앉아 피리를 불고 있었
다. 그 여인은 지상의 사람 같아 보이지 않을 만큼 신비스러운 분위
기를 지니고 있었다.

 "아, 당신은 어디서 온 누구요? 그리고 그 가락은?"
 그녀는 숨가쁘게 물었다. 그러자 피리를 불던 여인은 가느다란
미소를 띠더니 나지막하게 대답하였다.

 "나는 저 먼먼 바다 너머에서 온 수행자입니다. 그리고 이 가락은
거기에서 배운 것입니다. 이 가락을 가르치시는 분은 눈먼 수행자입
니다. 그분은 지금도 거기에서 피리를 불며 수행을 하고 있지요. 그분
은 쉰 살쯤 된 분인데 열여섯 살 된 아리따운 부인이 있습니다. 두
분은 거지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지요. 남편은 피리를 불고, 부인은
그 가락에 맞춰 춤을 춥니다. 사람들은 그분들을 불쌍하게 여겨서
돈을 던져 주지요. 그러나 두 분의 금슬은 세상 그 어떤 부부도 따를
수 없을 만큼 좋답니다."

 그녀는 놀라서 외쳤다.
 "아, 저 바다 건너에 나와 꼭 같은 여인이 있다니! 그리고 내 남편
과 꼭 같은 사람이 있다니!"
 그 여인이 말했다.

 "그런데 어느 날 그곳의 성주가 부인의 아름다움에 눈이 팔려서
부인에게 온갖 선물을 갖다주고 여러 차례 유혹을 했답니다. 그러나
그 부인은 상냥하게 고개를 저으며 성주의 청을 거절했지요. 그리고
두 분은 지금도 거지가 되어 온 세상을 떠돌아 다닌답니다."

 "그분들은 행복하던가요?"
 "물론이지요. 세상 그 어떤 부부보다도!"
 "아, 난 어쩌면 좋아! 그런데 그 나라가 어디입니까?"
 다급하게 묻는 소리에 여인은 조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흰눈이 덮인 험준한 산을 넘고 일곱 길 넘는 검푸른 파도가 솟는
큰 바다를 건너 저쪽 편 나라라고나 할까요……. 아니면 깊은 명상에
들었을 때 간혹 스쳐가는 그림자와 환영의 나라라고나 할까요…….

 그것도 아니라면, 저 망각의 강을 건너, 모든 회환과 서러움이 뿌리
채 뽑힌 끝없고 가없는 평화와 안식만의 나라라고나 할까요. 사랑하
는 사람을 어떤 이유로도 절대로 저버리는 일이 없고, 그런 배신
때문에 평생을 회한에 가슴이 피멍이 든 채 살아가야 하는 일도 아예
없는, 그래서 꺠달음의 빛과 사랑의 향기만으로 가득 찬……."

 그러더니 여인은 무어라 형언할 수 없는 깊고 신비로운 눈빛으로
그녀를 흘끗 올려다보고는, 피리를 입술에 대고 예의 그 슬프고 아름
다운 가락을 다시 불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