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여름이면 초록색으로,겨울이면 은빛으로 옷을 갈아 입었다.
이 숲 가운데로 시냇물 한줄기가 흐르고 있엇다.
시냇물엔 분홍과 다홍의 꽃잎들이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분홍,다홍 꽃잎은 길 잃은 벌레들을 태우고 가다가
적당한 곳에서 안전하게 내려 주곤 하였다.
시냇물은 꽃잎들과 잘 어울려 분홍과 다홍의
꽃잎들로부터 "한우리"라는 이름을 얻었다.
한우리의 나날은 즐겁고 행복이 충만했다.
한우리는 숲 속의 누가 와도 언제나 기쁘게 맞아 주었다.
아침마다 꽃들에게 먼저 아침 인사를 하는 것은 한우리였다.
아침 인사를 받은 꽃들은 꽃잎을 활짝 열어 한껏
향기로움을 선물하곤 했다.
숲 속에 사는 크고 작은 동물들 가운데
한우리를 좋아하지 않는 동물은 없었다.
그들은 그녀에게 찾아와 신선한 물 한모금을 얻어
마시곤 햇다.
짓굳은 동물은 그녀를 상대로 물장구를 치며
놀기도 하였다.
고요한 한밤중에는 그녀가 부르는 노랫소리가
한층 또렸하게 들려 오곤 했다.
조약돌이 깔린 곳을 지나갈 때면,
그녀는 어느때보다도 맑은 소리로 돌돌돌 노래했다.
물고기를 만나면 누가 빨리 달리는지
경주를 하기도 하였다.
그녀가 물고기와 경주할 때 깔깔거리며 웃는
그 웃음소리가 얼마나 맑고 상쾌한지
마치 숲 속의 음악소리 같았다.
달리다 지치면 그녀는 포옥 한숨을 쉬며
보드라운 둑 허리에 기대어 쉬어 가곤 했다.
둑 허리에 기대어 쉬고 있을 때도 그녀는  게으른
여자 처럼 펑퍼짐하게 주저앉는 일이 없었다.
잠시 쉬어 가더라도 은빛깔의 머리카락을
찰랑거리며 숙녀처럼 얌전하게 앉아 있었다.


한편 숲 속의 그늘에는 한우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한 여자가 살았다.
나이는 젊지만 웬지 늙어 보이는 기분 나쁜 여자였다.
언제나 이맛전을 찡그리고 눈살을 찌푸리고 있어서
일찍부터 겉늙은 얼굴이 되어 버린 모습이었다.
그녀는 폐와 심장과 위장 등 내부 기관까지도
잔뜩찌푸리고 있어서 소화불량과 순환 불량에 걸려 있었다.
때문에 그녀의 심장은 활기차게 박동할 여지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아 돌처럼 뻣뻣하게 굳어져 있었다.
그녀는 무엇이든 모아서 쌓아 두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래서 집안에는 별별 잡동사니가 다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 그녀에게
진정 소용이 닿는 것은 눈 씻고 둘러봐도 찾아볼 수 없었다.
쓸모없는 물건을 가득 모아 쌓아 두고 있는 것은
남에게 주거나 버리는 것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녀의 얼굴은 결코 남에게 좋은 인상을 주지 못하는
생김이었는데 설상가상으로 수박만한 머리통에
크고 작은 혹과 부스럼이 가득 솟아나 있었다.
숙녀 머리에 혹과 부스럼이 가득하니,
그 끔찍함과 추악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녀의 머리통에 만발한 혹과 부스럼은 시렁마다
가득가득 쌓아 놓은 물건들 때문이다.
그녀는 시렁마다 갖가지 함과 상자를
빼곡히 쌓아 놓았는데 그것들은 걸핏하면
시렁에서 떨어져서 머리통에 혹과 부스럼을 생기게 하곤 했다.
그처럼 걸핏하면 머리통을 얻어 맞으면서도
그녀는 시렁에 가득 찬 무거운 상자를 남에게
주거나 버리지 앟았다.
이 유별나게 탐욕스러운 여자의 이름은
"나만이"였다.
나만이는 이름처럼 오직 자기 생각밖에
할 줄 몰랐다.
자기 이외 다른 사람을 돌본다는 것은
꿈에서라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나만이는 생김새처럼 불행한 여인이었으나,
그녀 자신은 전혀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비록 머리통에 혹을 만들어 떨어지는 상자들이 있었지만
사방 시렁마다 물건이 가득 차 있기에
오직 행복할 뿐이었다.



어느 날 나만이는 숲 속을 어슬렁거리며 시렁 속에
얹어  놓을 물건을 찾아다니다가
숲 한가운데를 노래하며 지나가는 시냇물을 만났다.
그녀가 만난 시냇물은 마침 퍼져 오르는 햇살을 만나
잔물결 갈피갈피 은빛 비늘을 담안내고 있었다.
"지겨운 놈의 햇빛! 귀신은 뭘하구 있지......?
원숭이 볼기짝 같은 저 땡그란 해나 잡아먹지 않구....."
나만이는 그늘을 사랑하는 여자이기에
밝은 해만 솟으면 그렇게 입에 담지 못할 상스런
욕을 해대었다.
한데 시냇물을 보니 자신이 보기에도
아름답게 생긴 아가씨가 그 속에서 춤추고 노래하며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나무 뒤켠 짙은 그늘에 몸을 숨기고 그녀는
구시렁구시렁 혼잣말을 했다.

"칫....! 저 계집은 뭐가 좋아 춤을 추고 방정이람!
오늘이 지 혼인날이라도 되나,
아니면 돈이라두 생겼나? 이잉.......
그래, 맞아 돈이 생긴거야.
저렇게 신나게 웃으며 가는 걸 보면 큰 부자가 된게
틀림없다구."
나만이는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라 손바닥으로
자기 이마를 찰싹 때렸다.
"그렇지....!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속임수를 써서 시냇물 아가씨가 가진 돈을 고스란히 빼앗을 생각이었다.
만약에 가진 돈을 내놓지 않는다면
저주의 마법을 걸어서라도 시냇물 아가씨가 가진
모든 행복을 송두리째 뽑아내버리리라고 다짐했다.

그래서 나만이는 시냇물 아가씨 한우리에게
미적미적 다가가 얼굴에 잔뜩 꾸민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러나 하도 오랫만에 지어 보이는 미소라
나만이의 미소는 보기 딱할 만큼 괴상했다.
"안녕,숙녀님!날씨가 정말 좋아요!"
한우리는 갑자기 나타난 나만이를 보자
장식음이 섞인 아름다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으음....에,또.....그래요, 참으로 좋은 날씨네요."
"바쁘지 않으시면 제게 오셔서 목을 좀 축이시지요.
아주 시원하고 달아요.
수도물처럼 소독약 냄새도 안 나구요.
숙녀님의 입맛에 딱 맞을 거예요."
"에구, 고맙기도 해라.하지만 난 목마르지 않다우.
나는 숲 속에서 혼자 사는 쓸쓸한 늙은이우.
아가씨, 이 쓸쓸한 늙은이랑 잠깐 애기좀 하실까?"
"할 수 있구 말구요,숙녀님."
"아가씨 잠깐 좀 멈춰 주그려. 아가씨 발걸음이 너무 재서
이 늙은이가 미처 따라갈 수가 없수."
나만이의 부탁에 한우리는 고개를 살래살래 저었다.
"죄송하지만 숙녀님, 저는 멈춰서는 안 됩니다.
지금 전 여행중인데, 제가 겨냥하고 있는
목적지까지 가야 해요.
저 역시 하루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고 싶으므로
쉬고 싶은 생각두 없어요.
그러니, 숙녀님...... 제 사정을 이해해 주시고
힘드시더라도 지금처럼 함께 걸으면서 애기하면
좋겠어요."
"목적지...? 목적지라는 단어는 난생 처음 들어보는걸,아가씨?"
나만이는 계면쩍은 듯 머리통에 새알만큼 솟아오른 혹 하나를
만지작 거렸다.
"지금 저는 한낱 작은 시내에 불과해요.
자아,보세요...,어디서나 흔하게 만나볼 수 있는 시내죠.
시냇물이라면 모두 그렇듯이 저도 저를 스쳐가는
모든 것들을 사랑한답니다.
제 가슴에 가지를 드리우고 있는 나무들,
제 허리에 피어 있는 갖가지 꽃들,
함께 얼려 물장구 치는 물고기들,
그리고 숲 속의 착한 동물들.....
가끔씩 여행에 지친 나그네나 수행자들에게도
신선한 물을 아낌없이 나눠 드립니다."
"하지만 아가씬 그 비좁은 곳에서 나오지 못하잖우.
이 숲 속응 널찍하니,좀 나와서 거닐어 보면 좋지 않우.
답답하게시리 갇혀 지내지만 마시구...."
"숙녀님 말씀대로 제집은 좁고  답답하긴 하죠.
하지만 저는 이 작은 집 때문에 속상한 적은 없답니다.
숙녀님이 권한 저 널찍한 숲 속은 제집이 될 수 없어요.
그렇게 큰 데로 나가면 저는 길을 잃기 십상이니까요.
저는 요 좁고 작은 집이 제일 좋아요."
나만이는 이번엔 부스럼 딱지를 벅벅 긁으며 멋적게
고개를 갸웃했다.
"거 참 이상하네.
큰 집보다 작은 집이 좋다는 아가씬 보다보다 처음이군.
아가씨, 진심으로 하는 애기우,아니면 남 듣기
좋으라구 청빈한 체 해보는 거유?"
한우리는 의심 많은 여자의 말에
화도 내지 않고 여전히 미소를 띠우며 대답했다.


"제겐 소망 하나가 있거든요.
제 마음은 제게 이렇게 속삭여줍니다.
[들어라,내 너의 출생의 비밀을 애기해 줄테니......
너의 어머니는 크고 아름다운 먼 바다란다.
너는 지금 평범한 시냇물이지만,
어머니이신 바다에게 돌아가고 있다]구요.
말하자면 저는 바다를 어머니로 태어난 딸인 셈이죠.
언젠가 저는 어머니인 바다 속으로 돌아갈 거예요.
제겐 어머니인 바다가 저의 여행의 목적지예요.
목적지에 도달하면 제 여행은 일단 마무리되는 셈이죠.
거기서 저는 진짜 행복하게 살 거예요.
비로소 바다처럼 큰 존재가 되면서
이 세상 전부를 사랑할 수 있을테니까......자아,숙녀님
제가 멈출 수도 없고 널찍한 숲 속으로 나가서도 안 되는 이유를
아시겠지요?"

하지만 나만이는 한우리의 애기를 정말 눈꼽만큼밖에 이해하지
못하였다.
보다 큰 존재에 관해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일이 없었기에
그녀는 한우리가 큰 존재를 향해 끝없이 나아가는
의미를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뿜만 아니라 그녀는 한우리의 이야기 가운데 나오는
"사랑"이란 말 역시  한 번도 깊이있게 생각해
보지 못하였다.
따라서 한우리가 "큰 존재"가 되어 이 세상 전부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고 한 말을
"가장 큰 부자가 되어 세상 전부를 갖게 된다"는
의미로 잘못 해석하였다.
그래서 나만이는 흥분에 겨워 숨을 헐떡거리며
사뭇 꾸민 목소리로 물었다.
"에이구,이쁜 아가씨.정말 좋은 팔자를 타구났구려.
그러니까 아가씬 엄청난 부자의 상속녀인 셈이구.
아마두 돈이 너무 많아서 헤아려볼 생각두 못할 거유.
에이구,얼마나 좋을까.
이렇게 좋은 팔자를 타고났으니...!
한데 이쁜 아가씨,내 말 좀 들어 보시우.
내가 아가씨를 계속 동무해 줄테니,어떻수,그 재산을
상속 받거든 이 불쌍한 늙은이 좀 나눠 주지 않으려우?
에이구, 이쁜 아가씨, 보다시피 이 늙은인 집도 절도
없는 불쌍한 몸이라우."
"그럼요,숙녀님! 세상에서 둘도 없이 큰 재산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어요.
하지만 숙녀님,
이 상속 재산은 숙녀님 혼자 힘으로 찾아가야 한답니다.
제 몫을 나눠 드리고 싶긴 하지만,
이 상속 재산은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있는 것이 못되니까요.
숙녀님에겐 숙녀님의 몫이 따로 있으니,
숙녀님 혼자 힘으로 찾아가야 해요."
나눠 줄 수 없다는 한우리의 말에 나만이는 참을 수 없이 화가
북받쳤다.
그녀는 자신의 본색을 드러내 잔뜩 찌푸린 얼굴과
상스런 말투로 돌아가 잡아먹을 듯이 크르렁거렸다.
"그래 좋다,씨!
네 년과는 더 이상 말씨름 않겠다!
보석과 재산을 실어 나를 마차를 냉큼 가져오겠다!
그러니 빨랑빨랑 이실직고해!
어딜가야 내가 재산을 물려받을 수 있는지 말하라구!
바른 대로 말 않구 요리조리 말장난만 하면
고 아가릴 찢어 놓을테야."
한우리는 무섭고 상스럽게 변해 버린 나만이를 보자
질겁을 하고 달아났다.
달아나면서도 나만이를 위해 자신이  줄 수있는
마지막 조언을 나눠 주었다.

"아뇨!아뇨!숙녀님! 그런 게 아니예요.
마차에 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예요.
돈이나 보석이 아니라구요.
돈은 쓰임새가 많구,
보석은 정말 보기 아름답지요.
하지만 그런 것은 행복과는 그다지 상관없는 거예요.
아니 전혀 상관없다고 볼 수 있어요.
아,아,숙녀님!
제 말을 들어 주세요!
제가 말한 상속 재산은 그런 것을 애기한 게 아니래두요.
제가 말한 상속재산이란
큰 존재와의 합류, 합일을 의미한 거예요.
큰 존재와 하나가 되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뿐이랍니다.
그렇게 되면 세상 전부를 사랑할 수 있게 된다구
말씀드리지 않았던가요?
숙녀님,숙녀님...!
"참 보석"은 행복 외에 다른 것이 아녜요.
한데 행복이란 것은 "사랑"속에서만
발견할 수 있는 거예요.
사랑은 또한 받는 것엔 따라오지 않아요,결코!
사랑은 주는 것과 함께 따라오는 거지요!
숙녀님도 숙녀님의 마음의 소리에 조용히
귀를 기울여 보세요!
숙녀님의 마음이 뭐라 애기하는 소리가 들릴 거예요!
그 소리의 가르침을 따라 가세요.
그러면 숙녀님의 몫을 찾아갈 수 있어요!"

나만이는 미친 듯 팔을 휘두르며 한우리를 잡아보려고
내달렸다.
그러나 나만이는 근육마져 항상 찌푸린 채 살았기에
다리 근육이 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았다.
할 수 없이 그녀는 풀밭에 털썩 주저 앚아 도망친 한우리를
향해 험악한 말을 퍼부었다.

"알구 있으면서두 가르쳐 주지 않는 거야!
거짓부렁을 밥 먹듯 하는 년이라니까!
내가 순진해 뵈니까 이 년이 내게 거짓부렁을 다 해!
그 년이 뭐라구 재잘거리며 도망갔더라?
그래 애.....!
마음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라구?
그럼 내 상속 재산을 찾을 수 있다구?
무슨 되먹지 못한 수수께끼야.
마음이란 건 입이 없는 건데, 어떻게 말을 한단 말야....!
좋아....! 이 년이 날 우습게 본 모양인데,
어디 두고 보자!
네가 한 짓만큼 복수해 줄테다!"

나만이는 여자로선 차마 입에 담기 어려운 욕을 그처럼 수월하게
늘어놓곤 퉤퉤 가래침까지 뱉었다.
그리곤 자신을 조롱한 한우리에게  복수하기 위해
계략을 세우기 시작했다.


나만이가 복수의 계략을 세우는 데엔 별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에 안장을 얹어 탄 다음,
한우리가 도망간 쪽을 향해 달려갔다.
말이 조금이라도 속력을 늦추면 그때는 어김없이
가시 채찍을 휘둘렀다.
맹속력으로 달려서 한우리를 추월한 나만이는
얼마 뒤 복수하기에 꼭 알맞는 장소릏 찾아냈다.
그녀가 찾아낸 복수의 장소는
좁다란 여울목이었다.
나만이는 말에서 내려 복수의 계획을 실행으로 옮기기
시작했다.
숲 속에 들어간 그녀는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를 꺾어서
질질 끌고 나왔다.
인정사정 두지 않고 어린 나뭇가지까지 뚝뚝 꺾어서
여울목으로 끌어왔다.
여울목 옆엔 그녀가 질질 끌고 온 나뭇가지가 높직하게
쌓였다.
그녀는 이 나뭇가지들을 고스란히 여울목에 집어 넣었다.
여울목엔 잎이 무성한 나뭇가지들이 빼곡하니 들어찼다.
그렇잖아도 좁다란 여울목에 이제 튼튼한 제방까지
쌓아 놓은 것이다.
"그 년이 이 나뭇가지 제방을 뚫고 나가려면 온몸을 갈가리
찢겨야만 할 걸..."
나만이는 히죽히죽 웃으면서 자기가 만들어 놓은 제방에
마법의 주문을 걸었다.
그리곤 나무 그늘에 숨어서 한우리가 여울목에 도착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노래 부르며 가벼운 발걸음으로 달려오는
한우리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녀는 여울목을 지나가려다 뜻하지 않은 장애물을 만나 주춤거리며 멈추었다.
"어머나!이게 월까?"
그녀는 혼잣말을 하면서 자신을 가로막고 있는 제방을 바라보았다.
온 힘을 다해서 제방을 밀어냈지만,
그녀 혼자만의 힘으론 어림도 없었다.
두 번 세 번...., 젖먹던 힘까지 짜내 밀어 보았다.
그러나 여울목을 가득 채운 나뭇가지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마침내 둑가에 주저 앉아 절망에 차서 흐느껴 울었다.
그러자 나무 그늘에서 나만이가 낄낄거리고
웃으면서 불쑥 튀어 나왔다.
"헤,헤,헤....또 만났군. 자, 아가씨,왜 울고 있지?
그 이쁜 미소는 어디러 달아났나?"
"아, 숙녀님이시군요! 저는 지금 심각한 골칫거리에
부딪쳤어요.
으흐흑....이것 좀 보세요.
이 여울목에서 가야 할 길이 막히고 말았어요.
으흐흑....도대체 이런 못된 것을 여울목에 만들어 놨을까요?으흐흑...."
"하!그건 매우 쉬운 질문이군!"
나만이는 마음껏 비웃으며 대답했다.
"누가....누가....이랬을까요?"
"이,힛,힛! 아주 쉬운 질문이야.
내가 즉각 대답해 주지.
이 몸이 몸소 만든거야.
더 큰 일은 거기다가 마법의 주문까지 걸어둔 거지.....
그러니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그 제방을 벗어나지 못할 걸.
마법의 주문을 풀기 전까진 어림 한푼어치두 없다구.
네가 몸부림을 치면 칠수록 너를 그 곳에 가둔 나뭇가지
제방은 더욱 단단하게 얽혀버릴 걸...."
"뭐라구요? 당신이 이런 것을....만들었단 말이예요?"
"암!내가 그랬어.어때?놀랐지?"
"으흐흑!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일이라두 있나요?
당신이 원하기에  당신 재산의 몫을 찾아가는 방법까지
일러주지 않았나요?
으흐흑! 어서 이 못된 것을 사라지게 하세요."
"그래,그 점에선 네 말은 사실이야.
내 재산을 찾아가는 방법을 알려 주긴 주었지.
하지만, 네가 준 대답은 순전히 거짓부렁이었어.
되먹지 못한 수수께끼였을 뿐.....
"사랑은 주는 데서 얻어진다"구?
그리고 또 뭐랬지?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라"구?
마음이란 입이 없는 건데 어떻게 말을 할 줄 아니?
야아! 넌 날 바보 숙맥으로 취급했어!
나쁜 년 같으니라구..........
그래 내게 수수께끼를 선물했으니,
나두 걸맞는 선물을 해야 예의지.
그러니 잘 들어...!
인정을 발휘해서 너를 도와 주려는 거니.....
내가 건 마법의 주문을 풀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서
너 혼자뿐이야.
알아들었니....?
되풀이 말해 주는데, 너 혼자서만이 수수께끼를 풀 수 있어!
그리구 알아둬! 이 수수께끼는 풀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가 된다.
참 어렵지, 노력하면 노력할수록 반대 효과가 나오니....
암튼, 잘해 보라구.....!"
나만이는 낄낄 웃고는 말에 올라앉아 숲의 그늘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한우리는 눈물 속에서 그날 밤을 보냈다.
새 아침이 왔지만 그녀는 여전히 울기만 했다.
그리고 그날 낮과 밤도 슬픔 속에서 지나갔다.
한우리의 슬픔은 사흘째도 계속되었다.
나만이라는 고약한 여자만 생각하면 심장이
쥐어뜯기는 듯 아팠다.
나만이라는 여자가 만들어 놓고 간 제방도 마찬가지였다.
자기의 갈길을 가로막고 있는 제방만 생각하면
부글부글 화가 치밀었다.
분노와 괴로움 속에서 그녀는 수백번 자문자답하였다........
너무 불공평해! 이럴 순 없어.
그 부스럼딱지 늙은이에게 잘못한 일도 없잖아.
그 뿐이 아냐, 지금까지 난 곧게 살아왔어.
아무도 해친 적이 없단 말야.
한데 왜 이 처럼 비통한 일을 당해야 해?
하기야 그녀를 믿은 나도 어리석기 짝이 없어.
그 여자 생긴 것만 봐도 어떤 여잔지 알 수 있잖아.
그렇게 인상 나쁜 여자에게 한 또아리로 껴들어갔으니.....
한우리의 마음은 나만이라는 여자 생각으로 가득 찼다.
사흘,나흘  낮과 밤을 나만이라는 여자의 악의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나만이라는 여자를 수 없이 생각하느라고
다른 것은 깡그리 잊어버렸다.
파란 하늘을 보고도 더 이상 기쁘지 않았고,
꽃잎들이 얼굴을 간지렵혀도 더 이상 즐겁지 않았다.



한 아줌마가 우연히 그 곁을 지나가다
시냇물 아가씨가 주저앉아 울고 있는 것을 보았다.
아가씨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자위가 빨갛게 부어 있었다.
"실례해요,아가씨.
지나가다 아가씨 우는 소리를 들었어요.
가만 보니 착하고 이쁜 아가씨 같군요.
그런데 무슨 일로 그렇게 슬프게 우는지요?
아가씨보단 내가 인생 경험이 많을테니,
내게 애기해 주지 않겠어요?
힘닿는 대로 아가씰 도와주고 싶군요."
지나가던 그 아줌마가 한우리의 슬픔을 달래며 그렇게 이야기했다.
한우리는 무척 외롭고 서러웠으므로
자신의 마음을 열어 털어 놓았다.
"으흐흑...들어보세요,아주머니.
세상에 이렇게 불공평한 일두 있나요?
으흐흑...제 소망은 어머니이신 바다로 나가는 것이에요.
지금은 이렇게 작고 힘없는 시냇물이지만,
바다로 나가면 바다와 하나가 되어 온 세상을 두루
사랑할 수 있어요.
그런데,으흐흑....여기까지 잘 와서 저 놈의 제방 때문에
제 꿈이 무너지고 말았어요."
"오,오....!그랬군요.
그래 누가 이런 나쁜 짓을 했어요?"
"아주 인상이 고약한 여자예요.
뭐 나만이라나요,그 이름이?
혹 투성이에 부스럼 딱지가 더덕더덕해요.
그 막된 여자가 나뭇가지로 저 못된 제방을 만들었어요.
그리구 무슨 주문인지를 외어 꼼짝두 않게 했어요.
으흐흑....!
제 모습 좀 보세요....
더러워지고, 헝클어지고.....이젠 냄새두 나기 시작해요.
으흐흑......!  아주머니 전 어떡허믄 좋아요?"

"아가씨....진정해요......
그 여자가 주문을 외웠단 말이죠?
주문을 푸는 암시의 말 같은 건 하지 않았나요?
잘 더듬어 봐요,아가씨. 고만 울고요."
"......암시의 말요? 그런 말은 없었어요.
수수께끼 말뿐이었는 걸요."
"수수께끼.....? 어떤 수수께끼였죠?"
"....뭐라더라? 으음.....그래요, 그 주문은 저 혼자서만 풀 수
있다구....그러나 풀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풀기 어려워진다구....
아마 그런 뜻의 애길 했던 것 같아요."
한우리의 애기에 아주머니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가씨 혼자 힘으로만 풀 수 있단 말이죠?
그리고....풀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어려워진다.....
내겐 그 말이 이렇게 해석되는군요.
바로 아가씨 자신에게 주문을 풀 "힘"이 있다구요......
말하자면 내부에 그런"힘"이 존재한다는 뜻ㄹ이겠죠."
".....제게,저의 내부에 그런 힘이 있다뇨?
아무리 짚어봐도 제방을 무너뜨릴 힘은 저처럼 작은
시냇물에겐 없을 것 같아요.
아주머니,부탁이에요.......제발 좀 절 도와주세요.....!
같이 힘을 모아서 밀어부치면 제방은 무너질 거예요.....
그러니 제발, 아주머니...힘을 좀 보태주세요."
한우리는 사뭇 애원조로 부탁했다.
그러나 아줌마는 도리질을 하며 거절했다.
""미안하지만 그 건 안 될 말예요.
아가씬 방금 전의 내 말을 오해했어요.
아가씨 내부의 "힘"이란
물리적인 힘을 애기 한게 아녜요.
육체적인 힘을 애기한 게 아니라구요....!
다시 말하지만 그 힘은 아가씨의 내면의 힘이에요.
내 생각엔 "나만이"를 용서 하는 마음에서 그 "힘"이
솟아나올 것 같군요.
아가씨보다 많이 살아온 내가 배운 것이 바로 그거거든요.
"용서하는 마음에서만 걸림돌을 치워버리는 힘이 생긴다...."
자아,아가씨, 아가씨는 어리석게도 나만이라는 여자에게
집착하고 있어요.......
일테면 나만이라는 "귀신"에 잡혀서 스스로를 그녀에게
묶어 놓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녀를 용서하세요!
그리구 깨끗하게 잊어 버리세요....!
그녀를 용서했는데 이 속박의 주문이 풀리지 않는다 해도
아가씨가 지금보다 손해볼 건 없어요.
최소한 아가씨의 영혼을 누르고 있는 그녀에 대한 분노와 미움만은
들어내 버릴 수 있잖아요.
나만이라는"귀신"에 씌어서 끌려 다니지 않을 수도 없구요....."
"그녀를 용서하란 말이에요?
아주머니, 전 용서 못해요.....
절대로 용서 하지 않을 거예요!
이 모든 비극의 장본인인 그 여자를 용서하라니...!
차라리 여기 이렇게 갇혀 있다가
죽는 편을 택하겠어요....!"
한우리는 눈에 불꽃튀는 분노를 담고 흥분해서 소리쳤다.
그러나 아줌마는 얼음처럼 차갑게 대답했다.
"이거 봐요.아가씨!
내 귀가 잘못 듣지 않았다면, 아가씨의꿈과 소망은
큰  존재인 바다로 나가는 거예요.
그렇죠,아가씨?
그래서 큰 존재와 하나가 되어 온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
아가씨의 소원이었죠,아마!
한데, 자신을 한번 돌아다보아요!
그 불행한 여자.......사랑과 자비에 관해 생각해 본 일조차 없는 ,
정말 불행한 여자 하나 용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온 세상을
사랑할 수 있단 말이예요?"

그말에 한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의 자기 모순을 깨달았다.

"정말 그렇다...! 그 여자는 악랄한 여자라기보다
차라리 불행한 여자다......
머리에 솟은 그 혹과 부스럼만으로도 동정을 받아야 할 여자다.....
그렇게 불행한 여자 한 사람 용서 못하는 주제에
온 세상을 사랑하려 하다니........
차라리 종자그릇에 냇물을 담는 것이 쉽지......"

이렇게 생각하자 한우리는 가슴이 시원해졌다.

"아,아주머니......아주머니 말씀이 전부 옳아요.
전 미처 생각하지 못 했어요.
정말 그래요......그녀는 저보다두 더 불행해요.
저보다두 더 비극적이에요.
사랑과 자비에 관해 생각해 본 적조차 없으니.....
정말러 불행하고 비극적인 삶이에요."

그렇게 말하는 순간
그녀는 벌써 나만이를 용서하고 있었다.
"용서" 를 하면 언제나 아집이 떨어져 나가는 법.......
나만이를 용서하는 순간
그녀의 심장을 내리누르던 분노와 비통이 떨어져 나갔다.
그와 함께 나만이를 잊어버리고,
스스로 잡혀 있었던 나만이의 귀신에게서 풀려 나왔다.
그녀가 미움과 분노와 비통을 가슴에서 내려놓아 버린 순간,
나만이의 귀신으로부터 벗어나 버린 순간,
드디어 나만이가 걸어 놓았던 그 주문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나만이가 만들어 놓았던 제방이 힘을 잃기
시작하고, 그녀가 온 마음으로 나만이를 용서한 순간,
무서운 소리를 내며 무너져 버렸다.
그녀는 너무나 기뻐서 아줌마에게  감사의 말을 퍼부으려고
돌아다 보았다.
하지만 아줌마는 벌써 저만치 걸어가고 있었다.
아줌마는 숲 속으로 사라지면서
큰 소리로 그녀를 축복했다.

"잘가요,아가씨! 어서 여행을 계속해요!
우리 바다에서 또 만나요! 큰 존재이신 그 분 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