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나무는 자기가 왜 이런 외딴 곳에 쓸쓸하게 혼자
서 있어야만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무는 외로웠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눈을 비비며 살금살금 다가왔다.
너울 같은 안개가 걷혀가고 새벽은 어린 장난꾸러기처럼
깡총거리고 있었다.
언덕은 온통 이슬밭이었으며, 풀들은 모두 생기있게
빛나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언덕 위에는 두 살 난 아기의 뺨처럼 빠알간 장미
한 송이가 이제 막 피어나 몸단장을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안녕!"하고 장미가 나무를 향해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고 나무는 대답했다.
그리고 나무는 ,"나는 외로워요....."
하고 무심결에 말해 버리고 말았다.
"그건 무슨 뜻이죠?"
하고 장미가 되물어 왔다.
그런데 장미의 그런 도도한 반문은 나무로서는
정말이지 너무나도 뜻밖이었다.
순진한 나무는 장미의 기세에 그만 아주 당황해 버리고 말았다.
"저....그건 지난 겨울이....너무 추웠었다는 뜻이에요...."
나무는 겨우 얼버무렸다.
부끄러워 온몸이 움츠러들면서.
"아,알겠어요!"
나무의 그런 당황스러움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장미는 새침한 표정으로 꽃송이를 약간 쳐들며
생글생글 웃었다.
그리고는 덧붙였다.
"나처럼 고운 꽃송이를 가꾸어 보셔요! 그러면 세상이
아름다워 보일테니까요!"
그래서 나무는 장미에게 더 이상 아무 말도 해볼 수가 없었다.
나무는 꽃없는 자기 자신을 측은하게 바라다보았다.
이윽고 부챗살 같은 햇살이 비치기 시작하였다.
아침이 된 것이다.
이제 안개는 서서히 걷혀가고 아침은 저 멀리 산봉우리 위에
자주빛 구름을 받쳐 이고 있었다.
강둑 보리밭에 바람이 불자 초록빛이 물결처럼 일렁였고,
그때 종달새 두 마리가 씻은 듯이 투명한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안녕!안녕!" 하고 종달새들이 인사를 했다.
그래서 나무도 ,"안녕"하고 대답했다.
그리고 간신히 용기를 내어, "저....나는 좀 외롭거든요...."
하고 조그만 소리로 쑥스럽게 덧붙였다.
그러나 종달새들은 그런 나무의 말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들은 명랑한 목소리로 노래했다.
"세상은 이렇게 즐거운 걸요! 그렇죠?
당신은 그렇게 생각지 않나요?"
그래서 나무는 종달새들에게서 더 이상 말을 붙여 볼 수가 없었다.



종달새들은 제 갈 데로 날아가 버리고 해가 떠올랐다.
한낮이 되자 바닷가 모래밭은 온통 백금처럼 빛나기 시작했다.
눈부신 모래밭,그 모래밭 여기저기에는 색색가지
바닷돌들이 널려 있었다.
바닷물은 파도를 밀고 와서 모래펄을 간질이다가
제가 먼저 깔깔 웃고는 바스러지며 물러가곤 하였다.
그리고 그 눈부신 모래 위에 게들이 놀러 나왔다.
수십 마리도 넘는 게들이었다.
집게다리에 게걸음을 치는 그들은 서로 어울려
부드러운 모래밭에 꼬불꼬불한 그림들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러니 그 모래밭은 얼마나 신나는 게들의
그림책이었던지!
그리고 얼마나 재미있는 게들의 놀이터였던지!
"안녕!안녕!안녕!" 하고 게들이 인사를 했다.
"안녕......"하고, 이제는 한껏 풀이 죽어서
나무가 대답했다.
그리고 나무는 간신히 중얼거렸다.
"나는 외로워요....나는 친구가 필요해요..."
그렇지만 게들은 저희들끼리 장난질하며 한결같이
이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나무님, 이리 오셔서 저희들이랑 술래잡기를 해보시지 않을래요?
그러면 세상은 이렇게 즐거워질테니까요!"
그리하여 나무는 더욱더 쓸쓸해지고 말았다.
나무는 붙박힌 자리에서
한걸음도 움직일 수 없는 형편이었기 때문이다.



나무는 불현듯 목마름을 느꼈다.
햇볕이 바늘끝처럼 따갑게 느껴졌고,
나무는 자기가 아주 불행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나무는 슬펐고,
그리하여 나무는 외로뤘다.
그 슬픔은 한겨울의 추위보다도 더 아리게 나무를 짓눌렀고,
그 외로움은 가뭄 때의 목마름보다도 더 애타게
나무의 숨을 죄어 왔다.
사막 한가운데에 홀로 버려진 것만 같은 그런 외로움은
여러 날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그 아픔은 뿌리까지 스며들어 나무는 마침내
온몸이 굳어버리는 것 같은 무감각 상태에 빠지고 말았다.
그렇지만 나무는 제 스스로를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대로 포기 하기에는 삶은 너무나도 아쉬운 것이기 때문에.
"무언가가 있을 거야.....무언가가....."
나무는 슬픔을 안으로 삼키며 몇 번이나 제 자신에게
다짐하곤 하였다.
그리고 다시 얼마쯤의 시간이 흘렀다.

안타깝게 친구를 원했지만 번번이 새로운 외로움만을
되돌려 받았을 뿐인 그 일들,
그리고 그 일들을 견디고 달래는 작은 노력들,
그것으로 해서 나무의 마음은 조금씩 안으로 안으로
깊이 잦아들었다.
나무는 차츰 쓸쓸하고 서러운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되었고,
그로부터 또 얼마쯤의 날들이 더 지났을 때 슬프고도
고즈넉한 평화가 찾아왔다.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자기 자신의 가엾음을 견디고
되새기는  그런 슬픈 평화 속에서
다시 얼마쯤의 날들이 더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저녁 무렵이었다.
마을 쪽으로부터 한 아이가 터벅터벅 걸어서 그곳에 왔다.
마른 몸에 두 눈만 퀭한 아이였다.
작은 키,해진 신발,흙 묻은 베잠방이........
아이의 허술한 모습과,제 키보다 네 배나 길게 드리운 그림자를
물끄러미 번갈아 바라보면서,
나무는 뿌리까지 저려오는 까닭 모를 슬픔을 느꼈다.
"안녕...."
나무가 인사를 했다.
그러자 아이가 대답을 했다.
"안녕........"
"너는 웬지 외로워 보이는구나....."하고 나무가 물었다.
그리고는 그렇게 말해 버린 자기가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것은, 그 말에 자기의 애틋한 마음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몰랐다.
나무는 당황해서 얼른 덧붙였다.
"미안해,이런 말을 해서.......사실은 나는 외롭거든.....
그래서....혹시나 하고....나는 정말이지 친구가 필요하단다...."
그러자 뜻밖에도 그 아이는,
"그래!너도 그러니? 너도 친구가 없구나?그치?"
하고 반색을 했다.
"친구란 누구에게나 필요한 거야!
나무야,너도 외롭구나! 그렇지?
너도 가슴이 휑 뚫린 것처럼.......가슴에 슬픈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처럼......너도 그렇구나?그치?"
"응,그래.
나는 외로워. 나는 견딜 수가 없어.아이야,
나는 왜 아름답지 못한 거지?
나도 장미처럼 아름다운 꽃을 피워 보고 싶어...."
"나도 그렇단다,나무야.......나도 이쁘지 못해....."
그래서 아이들이 나를 좋아해 주지 않아.
그게 날 슬프게 해..."
이렇게 말하면서 아이는 나무의 밑둥치까지 저려
올 수밖에 없는 깊은 아픔을 담은 눈빛을 띠며
나무의 줄기를 가만히 어루만졌다.
"나는 왜 종달새처럼 즐겁게 노래할 수 없을까?
아이야, 나는 아무 것도 가진게 없어....."
하고 나무는 하소연을 했다.
"나도 그래. 나도 아무 것도 자랑할 게 없어...."
하고 아이도 말했다.
"난 공부를 잘 하지 못해. 그림을 잘 그리지 못하고,
노래도 잘 부르지 못해.
달리기엔 늘 꼴찌란다. 그리고 나눗셈 문제는
언제나 틀리기만 하는 걸....."
슬픈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고,
아이는 점점 맑은 빛을 더해 가는 초저녁 별들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나는 늘 한군데 붙박혀 있어야 해.
나는 게들처럼 재미있는 놀이를 할 수가 없어.
그리고 여긴 아주 외딴 곳이잖아?
아,나는 너무 외로워 미칠 것만 같아......."
나무는 울먹였다.
"나도 그렇단다....."
아이의 목소리는 이제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잖아?
나무야, 그렇지만 우린 그런 우리의 삶이나마 사랑하지
않음 안되는 거야....."
스며드는 물빛처럼 젖은 목소리로 아이는 나직이 말했다.
"꾹 참아야 해.....외롭고 슬프더라도 참아야 하는 거래.......
그런 다음 봄이 오는 거래.
엄마가 그러셨어.
빛나는 새아침을 맞이하기 위해서 밤은 그토록 깊은 법이래......"
"도대체 그 봄은 언제 오는 거지?
그리고 그 새벽은?
봄을 열 한 번이나 맞아 보았지만 아무 것도 없었어!
새벽이야 매일같이 찾아오지만 도대체 그 새벽이
어쨌다는 거야?"
그동안 겨우겨우 참아 왔던 아린 기억들이 되살아나서
나무는 이렇게 함부로 소리치고 말았다.
"그게 틀린거야!"
나무는 계속해서 아이를 윽박질렀다.
"내일, 내일하며 기다려 보자는 그것,
그게 틀린 거란 말야.
오늘이  어제는 내일이었잖아?
매일매일이 내일 아니었던 날이 있었어?
그렇지만 아무리 많은 내일들이 줄지어 온다고 해도  내가 끝내
꽃을 피울 수가 없는 나무라는 것에는 아무런 변함이 없어!"
마치 그런 사실이 모두 아이 때문이기라도 한 것처럼
나무는 아이를 향해 터무니없는 짜증을 부렸다.
"미안해......."
아이가 사과했는데,
사실 그에 대해서 아이가 미안해 해야 할 까닭은 없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나무의 슬픔에 대해 진심으로
미안해 했고,  이윽고 눈물을 주르르 흘렸다.
아이는 울면서 나무를 달랬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잖아?
길고 긴 괴로움이더라도 꾹 참는 수밖에......
네가 한 말은 너무 무서운 말이었어.
넌 그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알고나 있는 거니?
내일에 대한 희망을 포기한다는 것,
나는 너무 무서워......"
그러면서 아이는 나무에게 가만히 머리를 기대어 왔다.
아이의 그 순하디 순한 태도에 나무는가슴이 뭉클해졌다.
그렇지만 나무는 냉정을 가장한 채 말했다.
"네가 나한테 미안해 할 것은 없어.
그리고 내 생각은 너와는 달라.
세상은 그저 아무렇게나 있어진 건 아닐거야.
여러 까닭과 많은 이유들이 모여서 세상이 있게 되었을 거야.
그리고 그 까닭과 이유들이 나를 이렇게 만들어서
이런 곳에 세워 놓은 거겠지!
그런데 그 까닭과 이유란 게 도대체 뭐겠어?
그건 아름다운 것도 착한 것도 아니야!
그건 아주 제멋대로이고 무의미한 것일 뿐이야!
사실 내가 여기 서 있는 데는 아무 의미도 없다구!
그렇잖아?
내게 무슨 의미가 있지?
난 뭘 바라고 살아야 하는 거지?
난 무엇이 될 수 있는 거지?"
"나를 여기 세운 그것은 불공평하고, 맹목적이고....."
이렇게 말하다가 나무는 자기 자신이 너무나도 가엾게
느껴져서 그만 흑흑 흐느끼기 시작했다.
그런 나무를 아이는 가만가만 쓰다듬어 주었다.
"난 네가 틀렸다고 생각해........
분명히 무언가가 있을 거야.....안 그래?"
울먹이는 목소리로 아이는 가만히 나무를 위로했다.
"꾹 참고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는 기쁜 날이 있지 않겠어?
난 그렇게 믿어.그렇지?응?그렇잖아?대답해 봐?
너도 사실은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응?그렇지?"
나무는 그만 가슴이 콱 메어 왔다.
엷은 별빛만으로도  아이의 애처로운 눈빛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의 그 눈빛은 자기와 같은 종류의 아픔을 앓고 있는
영혼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었고,
또 보는 이의 마음속  깊은 곳에 뼈저린 아픔을 일으키는 한편으로,
웬일인지 그와는 매우 다르게 잔잔한 위안의 메아리를 울려 주는,
그런 부드러운 눈빛이기도 했다.
"넌 왠지 모르게 나를 부끄럽게 만드는구나......."
나무는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이의 야휜 몸과 허름한 옷을 바라보며,
그리고 그 애처러운 눈빛을 바라보며,
무슨 까닭인지 더 이상은 도무지 그에게 저항할 수가 없었다.
"네 눈은 너무 슬퍼 보여............"
마음이 약해진 나무는 아이가 쓰다듬는 손길을 지그시 느끼며
잦아드는 소리로 겨우 이렇게 말했다.
"엄마가 앓고 계시단다........그런데도 나는 아무 것도 해드릴 수가
없어.....그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인지 넌 알겠니?"
"알고말고!"
나무는 아이의 고통스러움에 전염이라도 된 듯 잎사귀들을
오한이 들린 것처럼 떨며 대답했다.
"아, 이제 난 네가 왜 이 먼 바닷가까지 터벅터벅 걸어왔는지
알겠어....넌 친구가 필요했던 거야.그렇지?
넌 아픔을 나눌 친구가 필요했던 거야!"
"그래,그리고 난 널 만났어!
이렇게 너랑 같이 있으니 외로움과슬픔이 조금 적어지는 것 같아....
나무야, 내가 가끔씩 널 찾아와도 좋겠니?"
"그럼 ,좋고말고!"
나무는 진정으로 대답했다.
그렇게 하여 둘은 친구가 되었다.


그 뒤로 아이는 슬픈 일이 있을 때마다 나무를 찾아와 주었다.
기쁜 일이 있을 때에도 꼭 나무를 찾아와 주었다.
그럴 때 아이는 나무에게 자기의 마음을 다 이야기하였다.
그러면 나무는 나뭇잎을 살랑거리면서
아이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곤 하였다.
때때로 나무는 자기도 자기의 슬픔과 외로움을 아이에게
모두 다 털어놓고 싶을 때가 있었다.
그렇지만 나무는 결코 그렇게 하지는 않았다.
나무는 아이의 가엾음을 알고 있었다.
그 가엾음을 견뎌 나가는 것만으로도
아이에게는 너무 벅찬 것이었다.
이제 나무는 자기의 고통에 대해서 투정만 늘어놓던 예전의 그
나무가 아니었다.
나무는 이제 사랑을 키우기 시작하고 있었고,
그 사랑은 나보다 그를,
그러니까 자기의 모든 것인 아이를 먼저 생각하게 하였다.
나무는 자기의 아픔은 젖혀둔 채 조용하게
아이의 이야기를 귀담아 들어주었다.
나무가 해줄 수 있는 거라곤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렇지만 단지 그뿐인데도 아이는 나무를 만나고
갈 때에는 언제나 기쁜 표정을 짓곤 했다.
나무는 그런 아이를 보며 은근히 기쁨과
보람을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많은 날들이 줄을 지어 지나갔다.
여름과 가을이 가고,겨울이 끝난 다음 봄이 왔다.
어느 날 아이가 다시 그곳에 왔다.
그런데 아이는 가까이  다가와서도
나무에게 인사도 하지 않았다.
얼굴이 전보다 야위어져 있었다.
아이는 언덕에 앉아 넋을 잃은 듯이 먼 바다를
바라보았다.
그러다가 아이는 한숨을 쉬는 것이었다.
아이의 눈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고였다.
이윽고 아이의 까칠한 두 뺨에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해가 지고 밤이 되었다.
별들이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아이는 벌써 여러 시간째 그곳에 있었다.
그런데도 아이는 집으로 돌아갈 줄을 몰랐다.
아이는 가끔씩 엄마....엄마........하고
나지막하게 중얼거릴 뿐이었다.
아이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해 주시던
병든 엄마가 이젠 아이의 곁을 영영 떠나버리신
것이라고 나무는 혼자 생각해 보앗다.
이윽고 환하게 달빛이 비추기 시작했다.
그제서야"안녕......."하고 나무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아이는 깜짝 놀랐다.
그때까지도 아이는 자기가 왜 무심결에
이곳까지 왔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아이도 곧 모든 사정을 이해하였다.
"안녕....."하고 아이는 겨우 대답하고는,
"나무야,난 이제 어떻게 하지?
엄마가 없이는 살 수 없을 것만 같아!
난 무서워! 하며 흐느꼈다.
"이럴 때 내가 너에게 힘이 되어 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무도 괴로워져서 말했다.
"......그렇지만 내겐 줄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으니......."
나무는 안타까웠다.
그렇지만 곧, 아이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자기에게로
왔다는 사실이 의미하는 그 무엇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무는 말했다.
"난, 네 친구지?그렇지?그러니까 나를 꼬옥 안아 봐....."
"그래도 괜찮겠니?"
아이가 쑥스러운 듯이 물었다.
"괜찮고말고!"
아이는 잠시 망설이더니 두 팔을 벌려 조심스럽게,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자기 친그를 꼬옥 껴안았다.
둘은 한동안 그러고 있었다.
나무는 이제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무는 이 아이,이 가엾은 아이를 위해서 이제부터
무엇인가를 새롭게 노력하지 않으면 안되리라는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그런 자각-----한 고통스러운 친구를 위해서 내가 있어
주어야 한다는 그런 깨달음은 나무의 수많은
이파리들을 살랑살랑 흔들리게 했다.
눈 내리듯 환한 달빛과 맑고 차가운 별빛이
봇물퍼럼 고인 밤의 바닷가에서 나무의 잎사귀들은
고요히 떨렸다.


그런 일이 있은 뒤로 나무는 아이에게 없어서는
안될 가장 귀한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아이도 나무에게 가장 소중한 마음의 친구가
되었다.
아이는 너무나도 애틋한 마음으로 나무를 아껴 주었다.
아이는 나무를 만나기 위해서 그 먼 길을
단걸음에 달려왔다.
그리고 나무를 위해 벌레를 잡아 주었고,
시원한 물을 길어 왔다.
그런가 하면 책을 읽어 주기도 했다.
나무의 줄기를 안아 주고, 볼을 부비고,
입맞추고,그러다가 피곤해지면 나무에게
몸을 기대고 단잠을 자기도 했다.
나무는 행복했다.
그런 행복 속에서 많은 날들이  흘러갔다.
가을 날, 떨어지는 나뭇잎처럼이나
수많은 날들이 둘만이 아는 비밀스런 기쁨과
애틋함을 간직한 채 사랑으로
차곡차곡 쌓였다.........


이슬진 아침의 풀잎처럼 청순하고,
장미빛 아기 노을처럼 고운 행복과 함께 수많은
낮과밤이 바뀌어 갔다.
그리고 아이에게는 변화가 오고 있었다.
아이는 점점 맑고 지혜로운 눈빛을 띠어가고 있었다.
하늘도 바다도 깊은 고요 속에서 한가로이 쉬는 가을의
어느 오후 쯤이면,
아이는 때때로 머리 숙여 가만히 생각에 잠기곤 하였다.
깊이 생각에 잠긴 아이의 모습은
차라리 슬퍼 보일 만큼 아름다웠다.
그럴때면 나무는 맑게 물든 나뭇잎 몇 장을
아이의 어깨 위에 살포시 떨어뜨려 주곤 하였다.
마치 그것이 자기가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가장 따사로운 어루만짐이기라도 하다는 듯이........

차츰, 아이의 이마 위에는 백양나무 숲 사이로
비쳐 드는 아침햇살과도 같이 부드럽고도 빠른 어떤
진실이 깊어져 가고 있었다.
나무는 때때로 아이에게서
거울같이 맑고 차가운 예지의 빛을 느끼며
싸늘한 감동을 받곤 하였다.
그것이 사랑의 비밀이었을까.
나무가 그윽히 지켜 보는 아래에서 아이의 마음이
마치 알프스 산속의 새벽 공기처럼이나 투명해져 가게 된 그것이.
그리고 나무의 머나먼 눈길 속에서 아이의 생각이 마치
인어들이 모여 산다는 산호 숲 속,
그 천 길 물밑처럼이나 고요히 깊어지게 된 그것이.
또한 그것이 사랑의 신비였을까.
나무에게는 생각에 잠긴 아이의 모습이
고요히 수면을 응시하는 새하얀 고니와도 같이
고상하게만 느껴지는 것이었으니.
"아, 산다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거야!"
나무는 가끔씩 이렇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눈꽃같이 깨끗하던 그런 사랑의 기쁨도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아픔으로 변해갔다.

계절은 바뀌어 어느 여름 날,
나무는 자기를 위해 땀을 흘리며 물을 길어오는
아이를 바라보면서,
문득 가슴이 메어오는 쓰라림을 느꼈다.
아이는 기쁘게 웃으면서 시원한 물을
나무에게 흠뻑 부어 주었다.
그렇지만 나무는 슬프게 흐느꼈다.
"넌 네가 가장 외로웠을 때 아무 보잘것없는
나를 찾아 주었어.
그건 네가 나를 친구로 생각했다는 거고,
그때부터 우린 서로 사랑했지.........
사랑하면서 우린,
서로 부끄러워하거나 미안해 하지 않아야 한다고
늘 다짐했어.
사랑하는 이들 사이에서는,
부끄럽다고 하거나 미안하다고 하는 것조차가
둘이 참으로 하나가 되지 못했음을 드러내는 한갓
인사치레 말밖에는 되지 않는 거니까.
사랑을 하게 되면 두 영혼이 하나가 되는 거고,
둘이 하나라면 그때는 "너와 나"가 아니라 둘을 합쳐서 그냥
"나"인거야.
어떻게 내가 나에게 미안해 할 수가 있겠어?
어떻게 내가 나에게 부끄러워할 수가 있겠어?
그래도 나는 네게 미안하구나.
아이야,날 용서해 줘......"
"무슨 말인지?"
아이가 깜짝 놀라서 되물어 왔다.
"그렇게 잘 알면서도 넌 방금 미안하다고 말했어!
그건 무슨 뜻이지?
"그래,그렇게 말하고 말았어.
사실 난 너무나도 미안하단다....."
나무의 목소리는 떨렸다.
"나는 안타깝단다.
나는 네게 아무 것도 줄 것이 없어.
나는 그것이 견딜 수 없이 슬퍼........
너는 나를 안아 주지만 나는 너를 안아 줄 수가 없어.
나는 네가 나에게 해주는 것처럼 너를 어루만져 주지도
못하고, 볼을 부벼 주지도 못하고,
입맞춰 주지도 못해..........
너는 책을 읽어 주기도 하지.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어.
나는 언제나 받기만 할 뿐이야.......
"......."
"넌 알겠니?나의 아픈 마음을!"
나무는 흐느꼈다.
"너는 내게 큰 기쁨과 순결한 행복을 주었지만
그것이 기쁨만이 아니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알았어.
내게는 사랑까지도 또 다른 고통이야......
너는 나를 만나려면 오랜 시간 동안 흙먼지 길을
걸어와야 해.
그리고 넌 나를 위해서 벌레를 잡아 줄 수도 있고,
물을 길어다 주기도 하지.
그렇지만 난 네게 줄 것이 없어.
난 늘 받기만 할 뿐이야.
내게도 할 수 있는 게 있다면 네가 나를 안고
볼을 부빌 때 잎사귀들을 고요히 떠는 그것,
네가 수많은 이야기를 재잘거릴 때
다소곳이 귀기울여 들어준 그것....."
"........"
"나는 다만 이렇게 서 있을 뿐이야....."
네가 갖가지로 나를 사랑해 줄 때 나는 너의 그 야위고
가냘픈 모습을 가슴 조이며 지켜볼 뿐........
가끔씩 나뭇잎 몇 이파리를 네 어깨 위에 살포시
떨어뜨려 주는 그것뿐........
그리고 너를 위하는 마음으로 내 가슴속에
붉은 사랑의 나이테를 그려가는 그것뿐이야......
하나,둘,셋.....그렇게 동그란 띠를 감아가는
보이지 않는 속내의 아픔,그것뿐이야.......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뿐,
내게는 마음 밖에 없어.
나는 다만 내 마음만으로 너를 사랑해 줄 수 있을
뿐이야......

나무의 안타까운 사랑의 말을 들으면서 아이는
나무를 꼬옥 안고만 있었다.
어느덧 아이의 눈에서도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아,나는 실컷 울고 싶어!"하고 나무는 말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기 전부터 나무는
이미 울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한참을 울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내려다보니, 이제는 아이도  울기를 그치고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아이는 꼼짝도 하지 않았고,
나무는 그런 아이를 말없이 지켜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생각에 잠긴 아이의 모습은 너무나도 아름다워 보였다.
지금,어떤 부드럽고도 고귀한 빛이 아이를 감싸고
있는 것이라고 나무는 생각했다.
사색에 잠겨 있는 어린 아이 하나,
그리고 곁에서 그 모습을 지켜 보고 서 있는
나무 한 그루.
에메랄드 빛 하늘을 머리 위에 드리운
외딴 바닷가 풍경은,
그 둘을 중심으로 시간도 흐르기를 멈추고
서 있는 것만 같이 고요하고도 아주 고요하였다.
한참 만에야 아이는 나무를 조용히 올려다보았고,
나무는 아이의 맑고 슬기로운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이렇게 생각해 봐,나무야......"
아이는 듣는 이의 마음에 자연스러이 스며드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와나의 차이는 다만 분홍과 초록의 차이일 뿐이라고
생각해봐.
그때 분홍은 분홍으로서 훌륭하고,
초록은 초록으로서 훌륭할 뿐 어느 것이
더 "나은"빛깔인 것은 아니야.
그러니 나는 한 아이로서 너를 안아 주기도 하고
입맞춰 주기도 하는 거고,
너는 너대로 한 나무로서 나를 지켜보아 주면 되는 거야.
너에겐 너의,나에겐 나의 역활이 있고,
그 역활은 각각 소중하며 각각 값진 게 아닐까?"

그렇지만 나무는 지난날 어느 새벽 자기를 향해 맑게 웃음짓던
장미를 생각했다.
나무는 그때의 부끄럽던 기억을 되살리며
말했다.
"하지만 장미가 아름다운건 사실이잖아?
그게 나보다 더 낫지 않니?
나는 왜 장미처럼 더 나은 역활을 맡아서는 안되는 거지?
아,이 문제 때문에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했는지 넌 알겠니?"
"알고말고! 나도 너처럼 그 문제로 괴로웠으니까!"
아이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도 가슴 아팠지? 그런데도 넌 말없이
그 괴로움을 견디며 나를 지켜 주었어........"
".........."
"이젠 내 차례야.
네가 그렇게 나를 지켜 주었듯이,
이제는 내가 너를 지켜 줄 차례야......."
"......"
나무야, 내 말을 잘 들어 보렴.
그렇게 "저울질"을 해서는 안돼.
난 그걸 알게 됐단다.
너를  사랑하면서,
너의 사랑 속에서 알게 된 거란다.
세상 모든 것들을 겉모습만으로 보고
저울질해선 안된다는 것을.......
나무야,세상 모든 것에는 각각 저마다의 모양과
빛깔이 있어.
하늘과 땅,바다와 산, 그리고 꽃과 나무며
새와 벌레들이 그것 때문에 구별되어지는 거고,
그건 나쁜게 아니야.
그런데 그것이 저울질로 가는 건 불행한 일이야......"

"저울질이란 무슨 뜻이지?"

"말하자면 네가 너 자신을 장미와 비교하고,
너에겐 꽃이 없는데  장미에겐 꽃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까지는 구별이지 저울질이 아니야.
그렇지만 그 때문에 네가 질투를 느낀다면 그건 저울질이란다."
"난 사실.....질투를 느낀단다......"

"나무야, 질투는 네게 행복을 주지 못한단다.
왜냐하면 질투는 경쟁심을 낳거든.
그리고 경쟁은 투쟁을 불러 와.
그 다음엔?
말할 것도 없이 그건 파멸이야.
그건 너 자신에게나 세상에게나 모두 불행한 길이란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지?
어떻게 하면 우린 행복해질 수 있는 거지?"
"참행복의 길로 나아가야지.
그 길은 저울질의 반대편으로 나 있단다."
"......"
"나무야, 그 길이 네 안에 있다고 하면 믿을 수 있겠니?"
"내 안이라고? 그건 대체 무슨 뜻이지?"
".....우리의 마음이 그 슬픈 저울질의 길로 가는 건
자기만을 아끼는 마음 때문이란다....
그런데 그 마음이 왜 일어나는 건지 넌 알겠니?
그건 무엇을 볼 때 겉으로만 보고,
안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그러니 우린 무엇을 볼 때 안을 볼 수 있어야만
하는 거야...."
"안을 보라고? 내 안엔 단지 나이테가 있을 뿐이야!"
"그래, 바로 그 나이테지!
네가 나를 위하는 마음으로 하나하나 그려가던
그 나이테가 널 행복하게 해주게 될 거란다!"
아이는 미소지었다.
"나무야, 네 나이테는 너 자신이 아닌 누군가를 사랑하고
위해주는 마음으로 붉게 그려져 있지.
그렇게 비워진 네 마음,
거기에서 너는 고요를,명상을,영원을,무한을 갖기 시작한 거야......
나무야, 그것이야말로 저울질의 반대편으로 가는,
향기로운 산딸기가 있는 행복한 오솔길의 첫어귀란다.
그 길을 쭈욱 따라가다 보면 기쁨이 샘솟는 맑은 샘물을
발견하게 되는 거란다......"
"......"
나무야, 네 마음은 어떤 때는 밖으로 나가서 너와 다른
존재들의 겉모습을 보고 저울질을 하기도 하고,
어떤 때는 되돌아와 속내마음으로 
사랑의 나이테를 그리기도 하지.
그런데 그중 어느 쪽이 더 아름다운 마음이겠어?
어느 쪽이 더 기쁜 길이겠어?"
"그래.....나도 이젠 조금 알 것 같아...."
"...나무야,
나는 누구를 볼 때 겉모습이 아니라 속내마음을
보려고 애쓴단다.
그리고 마음의 소리를 들으려고 귀를 기울이곤 해......
그러려면 마음을 아주 조용하게 가지지 않음 안돼.
나무야,
너를 안고 입맞추면서  내가 무엇을 보고,
무슨 소리를 듣는지 넌 알고 있니?"
"....."
"....나는 네 속에 있는 나이테를 보고 ,
네 속에 있는 맑은 우물을 본단다.
그리고 네가 그 우물 물을 길어 올리는 소리를,
그 조용하고 나직한 사랑의 노래를 듣는단다......"
"......"
" 그 소리는 여린 하아프의 음색을 닮았어.....
아,네가 그걸  믿어 준다면 참 좋을 텐데!
너를 진정으로 행복하게 해줄 수 있는 단 하나의 샘은
네 안에 있다는 것을 말이야!
그 샘은 네가 퍼올려 줄 때를 기다리고 있어!"

아이의 다정한 말을 들으면서 나무의 마음은
불현듯 무어라 이름지을 수 없는
신비한 안개에 묻혔다.
나무는 드디어 소리쳤다.
"너는 나를 사랑해,다른 누구보다도!
그러니 네 말이라면 난 따를 수 있어!
난 널 믿으니까!"
옛동화 속에 나오는 의젓한 왕자처럼 용기를 내며 나무는
씩씩하게 대답하였다.


그 후 나무와 아이는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러는 동안 나무의 마음은 조금씩 조금씩 아이를 닮아갔다.

아이의 말에는 상냥한 지혜가 솔바람 소리처럼 맑게 실려 있었고,
나무는 차츰 자신을 가지게 되었다.
웬지 모르게 아이와 함께 가는 이 길이 행복을
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참으로 가슴 뛰는 기쁨의 길이었다.
나무는 마치 사람들에게 오래오래 잊혀진
가시풀숲 속에 묻혀 있는 옛성을 찾아나서는
것 같은 설레임에 잔잔한 흥분을
느끼곤 하였다.

그리하여 나무의 생각도 차츰 남몰래 깊어져 갔다.
나무는 때때로 은물결처럼 반짝이는 고요한 평화를
느끼며 혼자 미소짓곤 하였다.
"아,이제 알겠어!"

그런던 어느 날 나무는 기빠하며 아이에게 소리쳤다.
"사랑"과"지혜"는 이 아름다운 오솔길에서
만나는 두 길잡이였어! 그렇지?"
"그렇고말고!"
아이가 기뻐하며 대답했다.
"그래! 무엇이 참으로 가치있는 것인가를 아는 것이 중요해!"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나무가 또 기뻐하며 소리쳤다.
"그리고 참으로 가치있는 것은 겉모습이 아니야!"
"그렇고말고!"
아이가 같이 기뻐하며 말했다.
"그래서 어떤 이는 말했단다.
"나는 누가 훌륭하다는 증거로써 속내 마음이
깨끗하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인정할 수 없다"고!"
"정말 그래!
그러니"훌륭하다"는 것은 "우수하다"는 것과는
다른 의미야! "좋은"것과 "나은"것이 서로 다른 것처럼.
그렇지?"
"다르고말고! 우수함이 능력과 겉모습에 관한 것이라면,
훌륭함은 속내마음에 관한 것이니까!"
"정말 그래! 그래서 우수함이 아니라 훌륭함이,
"나은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어!"

나무의 마음은 그렇게 해서 점점 내면의 훌륭함을 향해 나아갔다.
"아, 나도 이젠 알겠어!"

다시 며칠이 지났을 때 나무는 또 기뻐하며 소리쳤다.
"우리는 버림받은 것이 아니었어!
우리는 겉모습으로서는 그다지 혜택 받지 못하였지만,
마음만은 우리에게도 평등하게 주어졌으니까!
그런데 중요한 것은 마음이잖아?
오히려 우리는 그런 겉모습의 부족함 때문에 참으로
값진 단 하나의 것인 속내마음에 대해서
남보다 먼저 알게 되었어!
그러니 이건 얼마나 고마운 일이겠니!"

"그래,그래! 너도 이젠 그걸 알게 됐구나!"

아이가 행복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의 두 뺨에는 장미빛 홍조가 기쁨으로
환하게 떠오르고 있었다.
"아,이제는 나도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아!"


어느 날 나무는 아주 들떠서 소리쳤다.

"행복의 옛성은 "저곳"이 아니라,
"지금","이곳"에 있었어!
나는 이제 알겠어!
세상을 바꾸려 하기버다는 내 마음이 먼저
밝고 맑아져야 한다는 걸 말야!
마음의 오솔길을 가는 동안 나는 깃털처럼 아주
가벼워졌어!
날아 갈 것만 같아!
어때?
이제쯤 제법 기특한 나를 꼬옥 안아 주면 어떻겠니?"

"좋고말고!"
아이의 행복한 대답이었다.
아이는 나무를 장난스럽고도 사랑스럽게 안았다.
그리고는 자기의 뺨을  부드럽게 비벼댔다.
나무는 더없이 행복했다.
세상은 이제 눈부실 만큼 새로운 빛깔로
보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나무에게는 참으로 신비한 변화가 일어났다.
그토록 자신을 아프게 했던 장미의 아름다움--------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
슬픔과 고통의 씨앗이었던 장미의,종달새들의,
게들의 우수함이 이제는 나무에게
오히려 기쁨을 주기 시작한 것이다.
사랑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아무 부러움없이 그들의 자랑을 함께
기뻐하게 되었을 때,
깊은 속내마음의 진실을 지키며 세상 모든 것들의
겉모습이 아니라,
순수한 참모습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나무의 삶은
이제 결코 무너질 수 없는 어떤 아름답고도
순결한 빛이었다.
나무는 세상은 참으로 아름다운 거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많은 날들이 지나갔다.
나무는 차츰 자기의 내면에서
차오르는 맑은 생명력을 느꼈다.
생생한 건강이 나무를 애워쌌고,
나무는 초록빛 기쁨으로 눈부시게
빛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이도 씩씩하게 자랐다.

그러던 어느 맑은 날 아침이었다.
한 떼의 어린이들이 그곳에 왔다.
아이가 자기를 따르는
마을의 어린이들과 함께 그곳에  온 것이다.
이제 아이는 마을의 어린이들에게
가장 좋은 언니가 되어 있었다.
어린이들은 풀언덕과 모래밭에서
놀이를 하였다.
조약돌을 줍는 어린이,
소꼽장난을 하는 어린이,
어떤 어린이들은 모래밭 끝까지
달려가곤 하였다.
물장난을 치고 , 모래성을 쌓고,
그렇게 모였다가 흩어지고,
흩어졌다가는 다시 모였다.
바닷가는 순식간에
어린이들의 나라가 되었다.
물론 나무의 아이도 어린이들과 함께
어울려 즐거워하였다.
파도는 전과 다름없이 모래펄을 간지르다가
깔깔 웃으며 되돌아가고,
하늘은 맑고 드높았다.
장미꽃이 향기로운 초여름,
종달새 소리는 보리밭 쪽에서 명랑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아, 그때 나무의 마음은 따스한 빛으로
가득 차올랐다.
나무는 행복 했다.
서로 어울려 손과 손을 마주잡고 커다란 동그라미를
그리며 노래 부르는 아이와 어린이들을 바라보며,
나무는 이제 힘차게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꽃도 피우지 못하고 열매도 맺지 못하는 대신,
기쁨의 초록 이파리들을 하나라도 더 생생하게
피워야겠다고  나무는 가만히 마음먹었다.
어린이들의 노랫소리는 바다를 넘어
아득한 하늘 나라까지 날아가고,
나무는 뿌리를 펼치고 부지런히 물을 자아올리기
시작했다.
아름다운 여름 날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