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운 숲 속에 아주아주 행복한 수행자들의 모임이 있었다.
숲은 봄에는 고운 연두빛으로 물오르기 시작해서
부드러운 안개가 감돌았고 여름이면 건강한 초록빛 물결로 출렁거렸다.
가을에는 기분 좋은 황금색이었는데, 수행자들의 법의도 황금색이었다.
그리고 겨울에는 그윽히 내린 눈에 파묻혀 마치 숲 전체가
깊은 삼매(三昧)에 잠겨 있는 것 같았다.
수행자들은 넓은 숲 속에 흐르는 시냇물 가까운 곳에서
사원과 오두막들을 지어 놓고 수행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평화로웠고 행복했고 또 겸손했다.
수많은 수행자들이 함께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여간해서
불미스러운 일이나 말썽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 수행자들에게는 그들이 한결같이 따르고 존경하는 스승이 계셨다.
그분은 참으로 전설적인 존재였다.
우선 스승의 거처가 어디인지 수행자들에게도 알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분은 자신이 원하실 때에만 나타나서 수행자들에게
기쁨을 듬뿍 안겨주고는 표표히 사라져 버리곤 했기 때문이다.
떠도는 풍문으로는 그분은 "수행자의 숲"이 끝나는 지점에서
멀리 바라다보이는  "지극히 높은 산"의 정상에서
사신다고도 했고, 아예 한술 더 떠서 "해님의 궁전"에서
온 세상을 주재하시다가 가끔씩 지상으로 산책을
나오시는 것이라고 했다.
이런 모든 풍문은 매우 그럴싸해 보였다.
말하자면 그만큼 스승의 모습과 행동과 언어에서는,
신비롭고 깊고 자비롭고 그윽하고 밝고 빛나는
그 무엇이 항상 넘쳐흐르고 있었다는 말이다.
수행자들 중에는 이번에 스승께서 숲을 방문하시면
꼭 스승이 어디에 거쳐하시는지를 여쭈어 보고야 말리라고
벼르는 축들도 없지 않았다.
그들은 중얼거렸다.
"도대체 스승이 누구인지, 어디에 계시는지도 모르면서
수행을 하다니 말이나 되느냐 말야!"
"맞아 ! 우리 이번엔 꼭 스승께 그 점을 여쭈어 보자구 !"

그렇지만 헛일이었다.
왜냐하면 스승을 기다릴 때까지만 해도 그런 다짐이
생각으로 자리잡고 있을 수가 있었지만,
먼 발치로 스승께서 천천히 걸어오시는 모습이
눈에 띄면서부터는 그런 등등의 생각이 눈녹듯이 사라져 버리게
마련이기 때문이었다.
스승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모두들 행복감에만 젖어서
다른 생각이라곤 도무지 할 수가 없었다.
그만큼 스승은 눈부시게 신비한 분이었다.
그러다가 스승이 되돌아가시고 한참이 지난 다음에야
"내 정신 좀 봐 !
내가 질문드릴 걸 깜빡 잊었군 !"
하고 중얼거리곤 했다.
그 점은 대부분의 다른 수행자들에게도 그러했는데,
본래 수행이라는 것은 하다가 보면 이것저것 궁금한
문제들이 끊일 날 없이 뭉게뭉게 생겨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스승이 누구인지, 어디 사시는지의 문제야 사실 그렇게
중요할 것도 없었다.
스승께서는 필요한 때면 언제든지 적절하게 찾아와
주셨기 때문이다.
다만 수행중에 의문이 일어날  경우가 문제였다.
어떤 수행자들은 그런 의문들을 수집하기도 했다.
그래서 스승이 오시면 그것들에 대한 명쾌한 해답을 받아
두려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그러나 "의심이" 수행자가 주축이 된 그런 질문의 수집은 결국
허사로 돌아가고 말았다.
왜냐하면 스승께서 그 빛나는 하얀 수염을 날리며,
역시 빛나는 흰 옷을 입으신 채 부드러운 걸음걸이로,
한번 보면 도저히 잊을 수 없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미소를
띠며 다가오시자  의심이들의 의심은 해님 앞의 아침 안개처럼
소리도 없이 증발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그만큼 스승님의 감화력은 놀랍고도 신비로웠다.
스승님은 그곳에 오셔서도 무심히 수행자들을 바라보셨고,
별 말씀이 없으셨다.
그렇지만 그분의 행동은 입을 여시는 것보다도
더 많은 말씀을 뿜어내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눈빛은 수백 권의 경전보다도 가치있는
것이었다.
그 눈빛은 , 뭐랄까 , 아주 상냥하고 장난스러운 것이었다.
그 눈빛에 쏘이면 그 무엇이든 생기를 되찾지 못할 것이
없을 것 같은 그런 발랄하고 싱싱한 눈빛이었다.
곧 뭐라고 농담을 건넬 듯한, 부드러운 익살이
흘러나올 듯한 눈빛이었는데,
수행자들은 그 눈빛의 생명감을 잊지 못해서 스승께서
돌아가시고 난 뒤에도 두고두고 그 이야기를 하곤 하였다.
스승께서 다녀가시는 날이면 ㅡ 그것은 대개 한 계절에 한 번
정도였다 ㅡ 수행자들은 다투어 스승의 주변에 몰려들었다.
스승 가까이에 있게 되면 왠지 모를 힘이 생기고 희망이 넘쳐서,
스승님이 다녀가시고 난 뒤에도 얼마 동안은 무척 힘든 수행도
잘 해낼 수가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스승님의 인자한 눈빛과 한 번만 마주치고 나면
다음에 오실 때까지 흔들림없이 수행에 정진할 수 있었으므로,
수행자들은 앞다투어 스승과 눈을 마주치려고 애썼다.

스승님이 걷는 주변에는 항상 눈부신 햇살 같은
그 무엇이 기류처럼 흐르게 마련이었다.
그것은 예민한 사람이면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 한 없는 자비심이 느껴지는,
이른 아침 동녘 하늘을 장미빛으로 물들이는 노을과도 같은 사랑.......
그러므로 스승님의 설법은 이런 모든 감흥과 형언하기
어려운 그 무엇이 전부라고 해야 될 것이었다.
특히나 놀라운 것은 스승님의 그런 자비심이 수행자들뿐만이
아니라 숲 전체에 두루 미쳤다는 점이다.
스승님에게 있어서 수행자들은 숲의 나무나 풀, 새와 짐승,
곤충과 시냇물과 바람과 안개 등과 별 차이가 없는 모양이었다.
스승님은 천천히 고개를 돌려-----그 분의 행동은 항상 부드러우면서도
약간 느린 편이었으므로---- 수행자들에게 주시던 눈빛으로 나무들을,
그리고 풀,새,동물,곤충,시냇물......등을 바라보셨다.
그러노라면 그들 또한 마치 사람처럼 마음이라는 것이
있기라도 하는 양 제각기 특유의 기쁜 반을을 보였다.
은사시나무야말로 스승님의 은총을 받은 대표적인 숲 속 식구의
하나였다.
어느땐가 스승께서 벌레에 먹혀서 볼품없이 된 은사시나무 곁을
지나치시게 되었을 때, 그 나무로서는 너무나도 크나큰 축복을
받게 된 적이 있었다.
스승께서는 그 가엾은 나무ㅡ키도 작은 데다 폭풍에 둥치가 꺽이고
나뭇잎도 벌레 먹은,그리고 참나무와 가문비나무 등 다른 나무에
치여서 겨우겨우 웅크린 채 살고 있는 ㅡ 그 딱한 나무에게 다가가셨다.
그러자 은사시나무는 평소에 살랑살랑 곧잘 재잘거리던 버릇은
까마득 잊었는지 그야말로 쥐죽은 듯이 가만히 있었다.
아마도 너무나 놀라운 사실 앞에 숨이 막힌 ㅡ 나무에게도
호흡이 있다면 ㅡ 모양이었다.

스승께서는 그 가엾은 나무를 쓰다듬으시면서 한없이
자비로운 연민의 눈길을 보내셨다.
장난스럽고 생글생글하시던 스승님의 눈망울엔 어느덧 물기가 어렸다.
모두들 숨을 죽이고 있었다.
은사시나무는 가만히 흐느꼈다.
이 외로운 숲 속에서 가족도 친구도 없이 ,ㅡ새들도 못생긴
은사시나무에게는 앉아 주지 않았으므로 ㅡ 이야기를 나눌
벗도 없이 지내기가 무려 열두 해, 이토록 가슴 벅찬 사랑의
눈길을 받아보기는 처음이었기 때문이리라.
그런 일이 있고 난 뒤부터 은사시나무는 몰라보게 변하기
시작하였다.
차츰 건강을 되찾은 은사시나무는 숲 속에 생기를
불어넣는 역활을 하게 되었다.
점점 키가 자라 거목이 되어 간 은사시나무는
이제 한여름,찌는 듯한 더위 때문에 많은 나무들이
풀이 죽어 지쳐 있을 때에도 수만 개의 나뭇잎을 뒤채며
 플루트 소리를 내곤 하였다.
스 나뭇잎 팔랑거리는 은사시나무의 소리는 마치 자기의
맑은 마음을 영혼이라는 피리에다 대고 부는 노랫소리 같았다.
그것은 매우 신비한 음률이었는데 , 그 소리는 육신의
귀가 아니라 마음의 귀에까지 들리도록 가느다랗고
신비롭게 울려퍼졌다.
그 신비한 음률에, 더위에 지친 숲 속의 나무들과
수행자들은 새로운 힘을 얻곤 하였다.
그것이 어디 은사시나무뿐이었을까.
떡갈나무,앵두나무,도토리나무,다람쥐,토끼,카나리아,
비비새,여치,매미,풍뎅이,승냥이, 곰,사슴,산들바람,
흰구름,물웅덩이,시냇물,옹달샘,조약돌.......
숲 속의 모든 식구들에게 스승님의 자비는 두루두루
넘쳤다.
차츰 숲은 은혜와 자비의 빛이 출렁이게 되었다.
모두들 기쁨과 사랑으로 온몸과 마음을 반짝반짝 빛나도록
정화시켜 간 것이다.
그런데 이런 축복의 숲 속에도 한 가지 문제가 있긴 있었다.
그것은 모두들 허드렛일을 싫어한다는 점이었다.
아무리 수행자라고 해도 식사는 해야 하는데,
식사를 하고 나면 설거지가 문제였다.
수행자들이 모두 남자들이어서인지는 몰라도
손에 물을 적셔가며 설거지를 하는 데에는 모두들 질색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자신은 수행자이므로 당연히 설거지보다는
수행이 더 급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는 중에 수행자의 숲에 새로운 식구 하나가 들어오게 되었는데,
그의 이름은 누구에 의해선지 "느림이"라고 붙여졌다.
이 느림이 수행자는 신참이었기 때문에 그곳 사정을 잘 몰랐다.
다만 그는 스승님의 고명하신 덕을 흠모해서 머나먼 길을
맨발로 걸어서 거기까지 온 것이라고 하였다.

수행자 중에 "똑똑이"라는 수행자가 있었다.
그는 그야말로 영리한 사람이어서 눈빛도 날카롭고
말을 잘했을 뿐만 아니라 머리 회전이 빨랐다.
특히 그는 그 영리한 두뇌로 암암리에 수행자들 중의
지도자가 되고 싶어했고, 사실 어느 정도는 그렇게
인정받고 있었다.
특히 똑똑이는 설거지 따위의  허드렛일에는 취미가 없었다.
오직 수행에 관심이 있을 뿐이었으므로 식사도 급히 끝마치고
부리나케 사원으로 들어가 정진을 하곤 하였다.
그러면 누군가가 그의 식사 뒤끝을 치워야 했기 때문에
사실 그도 내심 미안했던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느림이가 왔다.
똑똑이 수행자는 이 젊은 친구를 보자 마자 그를 대번에
간파해 버렸다.
즉 "저 친구는 좀 얼뜬 데가 있군 !옳지!" 하고 생각한 것이다.
사실 그랬다.
느림이는 겉모습에서부터  좀 칠푼이 비슷한 데가 있었다.
생김새도 호박처럼 이목구비가 제 마음대로 자유로이
배열되어 있었고, 말도 더듬었으며,학식은 물론 경전이나
교리에 대해서도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똑똑이는 그런 느림이에게 설거지를 전담시킬 셈이었다.

많은 다른 수행자들이 똑똑이에게 내심 동조하였다.
그래서 결국 느림이는 주방에서 식사 뒤끝을 치다꺼리하는 것으로부터
수행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느림이는 천성이 태평해서인지 그 일을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그는 으레껏 자기는 그런 일을 해야 하는 거라고 의심도 없이
받아들였다.
그래서 수행자들은 그 지겨운 설거지로 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너무나도 기분이 좋을 수밖에 없었다.

"더구나 느림이는 설거지를 기꺼이 하는 것이다 ! 느림이가
그것을 억지로 떠맡은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자기 자신의 양심을 달랬다.

그러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서 상황이 달라져 갔다.
느림이 수행자에게  선배들보다 먼저 깨달음의 징조가
비치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 느림이 수행자는 경전 한 줄도 똑바르게 암송하지 못했으므로
모임에서도 언제나 뒷줄에 밀렸고, 허드렛일에 많은
시간을 빼았겼기 때문에 제대로 수행에 정진할 수도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일부 수행자들은 느림이릉 좋아했다.
무엇보다도 마음이 순박했기 때문이다.
식사라든지 빨래 같은 것은 거의가 다 느림이가 하는 편이었다.
청소도 그랬다.
느림이는 그런 데에 시간을 빼았겼기 때문에 법당에 들어가
염불이나 참선조차 제대로 해볼 겨를이 없었다.
그나마 법당도 수행자들 중 그저 반 정도나 앉고 나면
꽉 차버렸기 때문에 동작이 느린 수행자들은 예배조차 바깥에서
서서 보아야 할 정도였다.
보통 법당은 똑똑한 수행자들이 독차지하다시피 하였다.
사정이 그런 줄 잘 아는 느림이 수행자는 그 시간에 아예
법당은 포기하고 그들이 대강 해치우고 가버린 설거지 등을 했다.
느림이로선 섭섭한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였다.
수행을 해서 깨달음을 얻어 인생의 근본 문제를 해결하려고
수행자의 숲으로 온 이상 설거지보다는 수행이 더 필요했다.

"그렇지만 할 수 없지 뭐"

느림이는 안될 일은 쉽게 포기하는 성미였으므로 수행은 양보하고
자기는 뒷전에서 운력(수행으로서 하는 노동)을 한다든지
청소를 한다든지 한 것이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다른 사람들은 법당으로 몰려가서 수행 정진을 하고,
느림이는 동료 몇 명과 함께 그릇을 닦고 있었는데,
갑자기 느림이의 손길이 뚝 멈추면서 꼼짝을 않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동료들도 장난인 줄 알았다.
그래서" 이봐,느림이 수행자 ! 하던 일이나 계속하라구 !"하고
옆구리를 꾹꾹 찔렀다.
하지만  느림이는 여전히 꼼짝도 않고 그대로 서 있는 것이었다.
깜짝 놀란 동료 수행자들이 조심스레 느림이를 살펴보았다.

"놀라운 일이야 !"
한 수행자가 소리쳤다.

"정말이야 ! 도대체 이럴 수가 !"
"느림이 수행자가 삼매에 들었어 !"
과연 그랬다.
느림이 수행자는 그 순간 삼매에 든 것이었다.
그래서 모두들 느림이를 떠메어서 법당으로 데리고 갔다.
느림이의 눈은 조용히 감겨 있었고,
입가에는 연꽃같이 그윽하고  평화로운 미소가
감돌고 있었다.
그의 육신은 모든 것을 잊은 듯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에게서는 범접할 수 없는 힘이 흘렀다.
법당을 차지했다고 내심 흐뭇해 하며 좌선에 몰두하던 똑똑이들은
삼매에 든 느림이에게 물살이 갈라지듯 길을 비킬 수밖에 없었다.
느림이는 사람들에 의해 법당의 한가운데에 결가부좌로 앉혀졌다.
그날부터 꼬박 이레 동안 느림이는 삼매에 잠겨 있었다.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는 그렇게 앉아서 이레 동안이나 아무 것도 먹지도 마시지도 않은 채
지극한 평화와 영원한 불생불멸의 참모습을 맛보고 있었던 것이다.

느림이는 이레 만에 드디어 삼매에서 깨어났는데
그 뒤로도 그의 행동은 겉보기에는 별 차이가 없었다.
그는 여전히 설거지나 운력하는데 빠지질 않았다.
그러나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많은 수행자들은
느림이 수행자야말로 스승이 안 계시는 동안 우리를
지도할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사실 스승님은 한 계절에 한 번 정도만 그곳에 오시기 때문에
수행자들로서는 수행 지도를 받는 데 있어서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렇지만 스승님은 자신이 안 계시는 동안 수행자들을
지도할 그 누구도 지명하시지 않고 있었는데
그러던 차에 느림이 수행자가 눈에 띌 만큼의
진보를 보인 것이다.
많은 수행자들이 느림이 수행자에게 궂은 일만 맡긴
자기들의 처사를 부끄럽게 여겼다.
그래서 그들은 부끄러운 나머지 느림이 수행자로 하여금
"지도자의 자리"에 앉도록 권했다.
그렇지만 느림이는 소스라치게 놀라면서
"그런 말은 당치도 않아 !나는 그냥 설거지하는게
마음이 편하다니까 !"하고 말하곤 하였다.
본인이 극구 사양을 하는 데다가 똑똑이들 편에서 은근히
느림이 수행자가 지도자가 되는 걸 견제하였기 때문에
그 일은 그만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느림이 수행자에게 설거지를 떠맡기는 일은 그대로였다.


그렇게 한 계절이 지났다.
스승께서는 그 봄의 어느 날,
여느 때나 다름없이 수행자의 숲에 오셨다.
스승께서 오시는 때에는 벌써 모두들 그것을 다
짐작하게 마련이었다.
맑고 화창하게 날이 개이고,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깨달음의 빛과 향기가 숲에 퍼져서
스승께서 오시리라는 것을 예고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이다.
특히 수행자들보다 더 민감하게 스승님이 오실 것을
예감하는 쪽은 식물과 동물들이었다.
며칠 전부터 나무들이나 동물들은 이슬로 목욕재계를 하였다.
모두들 갓 피운 청록색 잎들을 말끔하게 씻고
경건한 마음으로 때와 먼지가 앉지 못하도록 조심들을 하였다.
그것은 동물들도 마찬가지였다.
육식동물들도 스승님이 다녀가시는 동안에는 살생을 멈추었다.
그리고 약한 동물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재계를 했다.

새들도 저마다 자기의 특징을 살리면서 스승님을
기뿐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그들은 멀리 날아가서 스승님이 오시는 것을 알아내어
숲 속에 전하는 전령 역활을 맡았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스승님이 오시는 것을 가장 먼저
느끼는 이는 느림이 수행자였다.
느림이는 스승님을 진심으로 믿고 있었다.
따라서 느림이 수행자에게 있어서 스승님은 늘 자기와 함께
계신 거나 마찬가지였다.
스승님은 느림이 수행자의 마음속에 늘 살아 있었던 것이다.
느림이는 스승님이 숲으로 출발하시는 것을,
숲으로 다가오시는 발자국 소리를,
그 부드러운 풀 밟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언제나 가슴속에 모시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느림이 수행자는 그 소리를 듣자 기쁨에 가슴이
뛰놀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도 느림이 수행자가 그런 예감을
맨 먼저 안다는 사실을 몰랐다.
아무튼 스승님이 오셨다.
숲 속의 모든 식구들이 마중을 나갔다.
그것은 참으로 장관이었다.
나무나 풀,바위,옹달샘 등 자기 마음대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
 친구들은  물론 어쩔 수 없었지만,
몸을 움직이는 모든 생명을 가진 이들이 마중을 나온 것이다.
하늘에서는 갖가지 새들이  구름떼처럼 날면서 재재거리며
스승님을 찬양했고, 온갖 동물들이 무리지어서  뒤를 따르면서
스승님과 함께 진리의 향기가 적시는
기쁨의 이슬을 흠뻑 맛보았다.
인간인 수행자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었다.
모두들 스승님을 가까이에서 모시려고  다투어 나아갔고,
기쁨에 피곤한 줄도 몰랐다.
스승님은 숲에 도착하시자 예전처럼 그 자비롭고 은혜로운 눈빛으로
모든 생명 있는 것들에게 축복을 주셨다.
그 축복은 앞으로 한 계절 동안 숲 속의 모든 식구들이
호흡하기에 충분한 만큼의 "진리의 빛" 이었다.
그리고 나서 스승님의 눈빛에는 약간의 의아스러움이
잠깐 스쳐갔다.
그러나 아무도 그런 스승님의 의문을 눈치챈 사람이 없었다.
왜냐하면 모두들 가뭄 끝의 단비 같은 스승님의 친견(親見)에
들떠 있었기 때문에.


숲 속의 모든 식구들이 그렇게 스승님과 같이 사원으로 되돌아오는
그때에 유독 단 한 사람 사원을 지키고 있는 이가 있었는데,
그는 바로 느림이 수행자였다.
느림이 수행자는 사원을 지킨다기보다도 자기가 할 일,
즉 설거지를 다 끝내지 못한 탓으로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느림이 수행자로서도 스승님을 마중하는 맨 앞줄에서
스승님의 자비로운 눈길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을 리는 없었다.
그렇지만 그 또한 자기가 원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었다.
똑똑이들의 등쌀에 뒤로 밀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그럴 바엔 차라리 맡은 일이나 하자는 것이
느림이 수행자의 생각이었다.
지난 계절까지만 해도 느림이 수행자는 부지런히 일을 마치면
그래도 뒤늦게나마 스승님 마중을 나가서 먼 발치로라마
스승님을 뵈올 수가 있었다.
하지만 그사이에 일감이 는 데다가 도와주던 동료까지
자기 일을 느림이에게 맡기고 가버렸기 때문에,
느림이 수행자로서는 그나마의 희망마저도
버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스승님께서는 천천히 일행과 함께 사원으로 들어오셨다.
그러더니 여느 때 같으면 먼저 법당에부터 들리시던 발길을
왼편으로 돌리셨는데,
모두들 스승님을 우러르느라고 그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잇었다.
스승님은 일행을 이끌고 느림이가 일하고 있는
식당 쪽으로 가셨다.
그때까지도 느림이 수행자는 콧노래로 진리를 찬송하면서
설거지를 하고 있었다.
그의 두 손은 매일같이 물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퉁퉁 불어서 하얗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보통 사람의 두 배나
커진 듯 매우 볼썽 사나웠다.
일행이 다가온 줄도 모르고 수행자는 그릇 닦기에
몰두하고 있었다.
모두들 숨을 죽였다.
스승께서 이곳으로 오신 이유가 짐작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뭔지 모르게 자기들이 큰 잘못을 저지르고 있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꼈다.
그래서 그들은 부끄러움에 입을 다물었다.
그때 스승께서는 천천히 느림이에게 다가가셨다.
그리고 느림이의 옆에 서서 느림이가 헹구어 내는 그릇들을
받아서 차곡차곡 포개는 작업을 돕기 시작하셨다.

느림이는 누가 자기를 돕고 있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그릇들을 헹구어 냈다.
그리고 스승께서는 그것을 받아서 그림같이 아름답게
쌓기 시작하셨다.
그것은 참으로 멋진 장면이자 매우 기묘한 장면이기도 햇다.
수많은 수행자들과  동물과 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일에 깊이 몰두해서 모든 걸 잊은 채 그릇을 헹구는 느림이,
그리고 그것을 받아 쌓아가는 비할 데 없이 고상하신 스승님
느림이의 투박한 옷차림과 스승님의 눈부신 흰 옷의
대조가 신비스러웠다.
일이 다 끝날 때까지 그런 장면이 계속되었고,
모두들 숨죽이고 있었다.
바람조차도 움직이지 않아서 숲은 그야말로 정적,
그것이었다.
찰방  찰방  찰방 .....그릇 헹구는 소리와,달각  달각  달각....
그릇 쌓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이윽고 일을 다 마친 느림이 수행자는 기분 좋은 표정으로
느긋하게 허리를 폈는데, 순간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느림이 수행자는 한동안  어리둥절해 있다가는
이내 모든 정황을 알아챘다.

"스승님 !"

느림이는 스승의 발 아래 꿇어 엎드렸다.
그의 눈에서는 눈물이 흘렀고,
스승께서는 이 세상 그 누구에게도 보낸 적이 없었을
자비로운 눈길을 느림이 수행자에게 던지셨다.
그러시더니 무릎을 꿇어 느림이 수행자의 두 손을 잡고
퉁퉁 불은 그의 손을 수건으로 정성스레 닦아 주셨다.
그때 스승의 눈에서는 사랑과 자비가 호숫물처럼
그득히 넘쳤고,  감격한 느림이 수행자는 차마
스승의 눈길을 마주대할 수조차 없었는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눈을 들어 나를 보라 !"
스승께서 이윽고 느림이에게 이르셨다.
"느림이 수행자,나를 보아라 !"
느림이가 너무나 황송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자
스승께서 다시 이르셨으나, 겸손한 느림이는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 흑흑 흐느끼기 시작했다.
한참의 시간이 정적 속에 흐르고,
아무도 소리내는 사람이 없엇다.
이윽고 수행자들 중에서 누군가가 그 침묵을 깨뜨리며
소리쳤다.

"느림이 수행자,제발 스승님을 쳐다봐 줘."

목소리의 주인공은 똑똑이 수행자였다.
그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는데,그의 다음 말은 거의 울먹임이었다.

"느림이 수행자가 그러고 있으니까 견딜 수가 없어 !
이제부턴 느림이 수행자가 우리 지도자야 !"

그 소리에 느림이는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스승의 눈길이 느림이 수행자의 눈길과 마주쳤다.
그 찰나에 느림이 수행자는 깊은 삼매에 빠져 들었다.
느림이 수행자는 너무나도 깊은 평화의 모습으로
신비한 미소를 띤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많은 수행자들은 참을 수가 없었던지 큰소리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들은 너무나도 자기 자신이 가엾고 측은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그들 중에는 벌써 2,3년 혹은 7,8년 이상 수행에 매진해 온
이들이 많았다.
갖가지 고행을 통해 삼매를 맛보고 깨달음을 얻어보려고
피눈물나는 노력을 해온 수행자들이었다.
그런데 아직 예비수행자에 지나지 않는
저 얼띤 느림이에게 크나큰 빛이 내린 것이다.

"너희들 중 그 누구도 느림이 수행자보다 더 나를
마중 나온 사람은 없다  ."
하고 스승께서는 수행자들을 돌아보며 말씀하셨다.
그것은 꾸중이 아니라 애처로운 당부의 말씀이었다.

"그리고 너희들 중 그 누구도 느림이 수행자처럼
언제나 나를 만나는 사람도 없다.
왜냐하면 느림이 수행자는 언제 어디서 무엇을 할 때나
자기를 낮추었기 때문이다.
진리는 가장 낮은 곳에  고이는 물과 같다.
그리고 스승 또한 언제나 가장 낮은  이와 함께 한다.
이것이 바로 느림이 수행자에게  제일 먼저 진리의
빛이 비친 이유이다.
진리란 높고 거룩한 곳에서가 아니라 ,
가장 낮고 누추하고 사소한 곳에서
피어나는 법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로 수행자의 숲에서는 앞다투어 서로 설거지를
맡으려는 경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아무도 느림이 수행자처럼 그것을 통해서
삼매를 얻을 수 있었던  사람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