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딘의 아버지는 불과 열 다섯 살 때 데라둔 근처의
골짜기로 내려왔다.
아마도 바깥 세상을 경험하려고 깊숙한 산골 마을의 고향집에서
도망 친 듯하엿다.
그는 글자도 모르는 무식한 소년이었던 탓으로 골짜기의 농장에서
일꾼 노릇을 하며 먹고 살 도리밖에 없었다.
농장에서 하루에 여덟 시간을 꼬박 일하면 주인이 그에게
기껏해야 하루 두 끼 씩의 음식을 주었다.
그것 말고는 일해준 대가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몇 해가 흐른 어느 날,
그는 농장에서 일하다가 여자 일꾼 하나를 만났다.
그들은 첫눈에 반하여 얼마 안 가서 결혼을 했다.
그 여자는 영리했기 때문에 남편이 품삯도 없이 일을 해 왔다는
것을 알고는,
앞으로 농장에서 일을 할 때는 품삯을 받으라고 말했다.

그는 매우 부지런한 일꾼이었기 때문에
농장 주인들은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품삯 대신 그에게 쓸모없이 버려져 있던
작은 땅 한 조각을 주었다.
이 땅은 쓸모가 없어 전에는 쓰레기를 쌓아 놓던 곳이었다.
그와 아내는 이 땅에 오두막집을 짓고 행복하게 살기 시작했다.
그들은 젖을 짜기 위해 염소 한 마리를 샀다.
염소는 그들과 한 식구가 되어,
모두가 오두막집 안에서 함께 살면서 지푸라기와 나뭇잎으로
만든 잠자리에서 함께 잠을 잤다.

신의 은총으로 여자는 임신을 하여,
달이 차자 귀여운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들은 아이의 이름을 '람딘' 이라고 지었다.
그 이름은 '라마 신의 선물' 이라는 뜻이었다.
람딘의 아버지는 초등학교 문앞에도 가본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이제 그는 만일 자신이 학교를 다녔더라면
지금쯤 하찮은 품팔이 일꾼보다는 더 나은 존재가 되었을  것이라고
후회하게 되었다.

자기의 아들에게는 똑같은 실수를 되풀이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는
아들을 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했다.
공부를 시켜 놓으면 남들보다 훨씬 많은 돈을 벌지 누가 아는가 ?
그리하여  늘그막에는 자기가 부자 아들을 둔 아버지가 되어 있을
것이라고 그는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람딘에게 모든 희망을 걸었다.

람딘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람딘이 예닐곱 살쯤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람딘을 학교에 보내려고 무척 애썼지만,
너무 가난해 등록금은 커녕 책이나 옷을 사 입힐 돈조차 없었다.
람딘에게 젖을 짜먹일 한 마리만 남기고 키우고 있던 염소들을
모두 팔았다.
그랬더니 겨우 그들 세 식구가 옷 한 벌씩 사 입을  돈이 생겼다.

람딘의 아버지는 지금까지도 옛날에 땅 한 뙈기를  준 감자 농장
주인들을 위해 돈 한푼 받지 않고 일을 해주고 있었다.
그 땅은 그가 평생 일할 품삯 대신이었던 것이다.

람딘의 아버지는 아들이 학교를 다니지 못해 자기처럼
농장의 일꾼으로 살면서 평생을 보낼까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는 읍내로 나가서 누군가 한테 아들의 학비를 꾸어야
되겠다고 결심했다.
아들이 학교만 졸업해 준다면 이 모든 가난이 끝나리라고
굳게 믿은 그는 아들의 교육을 위해서라면
어떤 고난도 참고 견디는 것이 지혜라고 생각했다.

그는 아들의 학비를 위해 돈을 꾸어 줄 사람을 찾기 위해
데라둔 시내로 나갔다.
어떤 부잣집으로 찾아간 그는,
아들이 교육을 마치고 취직을 하면 갚는다는 조건으로
돈을 좀 꾸어 달라고 부탁했다.

부자는 그의 어리석음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너는 정말 어리석은 인간이다.
너의 아들도 너처럼 어리석은 인간이 될지 누가 아는가 ?
너는 가난한 사람으로 태어났고,
너의 아들도 마찬가지다.
세상에는 부자들에게 봉사할 가난한 사람들이 필요하다.
그러니 어서 너의 마을로 돌아가 일이나 하고,
아들을 학교에 보내겠다는 생각일랑 말아라."

람딘의 아버지는 대단히 슬펐다.
읍내에서 돈을 구하지 못한 그는 대신 당시 데라둔에
유행했던 콜레라만 걸리고 말았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는 죽었으며,
그의 아내 역시 전염이 되어 몇 시간 뒤에는 그녀까지 죽고 말았다.
부모가 죽자,
람딘은 찌든 가난을 포함해서 모든 재산을 물려받았다.
때마침 염소가 새끼를 두 마리 낳아,
오두막집은 다시 네 식구가 되었다.

람딘은 불과 아홉 살밖에 안 먹었지만,
가난이 그에게 자신의 힘으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다른 사람들도 콜레라에 걸려 많은 숫자가 죽었기 때문에
어디서나 일꾼이 부족했다.

람딘의 아버지가 평생동안 일해 준 감자 농장 주인들 가운데 하나도
콜레라에 아내를 잃었다.
그는 일꾼이 몹시 필요했기 때문에 당장에 람딘을 불러
그의 아버지가 일했던 것과 똑같은 조건으로 농장에서
일을 하게 했다.
람딘이 부모를 잃은 슬픔과 자신이 아내를 잃은 슬픔을 비교한 농부는
람딘에게 매우 친절히 대해 주었다.
그러나 어떤 때는 람딘의 아버지가 콜레라를 옮아왔기 때문에
자신의 아내가 죽은 것이라고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

람딘이 키우는 염소들은 아침이면 저희들끼리 숲속으로
가서 풀을 뜯다가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왔다.
염소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람딘 자신은 농부의 집에서 옷과 음식을 다 제공받았다.
그는 부족함이 없이 행복을 느꼈으며,
죽은 부모에 대해서는 서서히 잊어갔다.

사오 년이 지나자
람딘은 세상에 대하여 좀더 깊이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마음에서는 농부가 친아버지나 다름없었고,
또 어떤 때는 농부가 아버지에게서 자기를 하인으로 산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평생을 그 농장에서 일꾼으로
지내야만 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사이 감자 농장 주인은 아름다운 여성과 재혼하여
죽은 아내의 고통을 잊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열 두 살 먹은 예쁜 딸이 하나 있어서,
딸을 볼 때마다 죽은 아내가 생각나서  그를 슬프게 만들었다.
그의 슬픔은 새 아내의 날카로운 눈에 당장 띄었다.
그녀는 그의 딸 ' 수로차나' 릏 질투하기 시작했다.
수로차나는 아름다울 뿐 아니라 매우 총명했다.
그녀는 아버지보다  감자를 더 잘 팔았다.
아버지는 그녀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끔찍이도 그녀를 사랑했다.
아내 역시 아름답긴 했으나 그리 부드러운 성격이 아니었다.
그녀는 신경질이 많고 ,
수로차나와 아버지가 대화를 나누는 것을 참지 못했다.
농부는 그 사실을 알고,
두 사람을 떼어 놓기 위해 수로차나를 읍내에 감자를
팔러 보내곤 했다.

그래서 수로차나와 그녀의 계모는 하루 종일 얼굴이 마주칠 기회가
없었지만,
밤이 되면 수로차나는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었다.
이때가 그녀의 계모가 그녀를 공격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다.
계모는 그녀가 먹는 음식에다 고춧가루와 소금 등을 마구 넣어
그녀를 괴롭혔다.
그래서 그녀가 음식이 간이 맞지 않는다고 불평하면
계모는 마구 소리를 지르곤 햇다.

"내가 만든 음식에 투정을 부리다니 !
나는 혼자 몸으로 온종일 집에서 일을 하는데,
고작 돌아오는 대가가 이것이냐 !"

수로차나가 음식을 남기기라도 할라치면 그녀의 계모는
또 이렇게 소리쳤다.

"너는 읍내에서 잘 먹는 모양이로구나.
그러니 집에서야 입맛이 없겠지.
너한테는 돈을 한 푼이라도 쓸 권리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야 해.
읍내에서 과자나 좋은 음식만 먹는 습관을 길렀으니
집에서 요리한 음식이 맛있을 리가 없지.
그러면서도 너는 언제나 온갖 음식만 찾는 네 입을 탓하지 않고
내 음식이 나쁘다고 탓할거냐 ?
그런 식으로는 나는 너의 비위를 맞출 수가 없다."

농부는 알면서도 자신의 아내가 틀렸다고 말할 수가 없엇다.
자기가 딸의 역성을 든다고 그녀가 더 큰 싸움을 걸어오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하고 돌아와서 아무 잘못 없이 욕을 먹는
딸을 보는 것이 그로서는 큰 고통이었다.
그 둘 사이를 가능하면 떼어 놓고 싶었지만
어느 한 쪽을 내볼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수로차나는 이제 겨우 열 여섯 살이었고,
시집을 보내기엔 아직 이른 나이였다.
그렇다고 딸을 남의 집에 가서 살게 할 만큼 준비가 넉넉히 되어 있는
형편도 아니었다.
아버지로서 그것은 매우 부끄러운 일이었다.
처음에는 람딘을 마음에 들어 했던 그의 아내는
남편이 자기의 전처와 람딘의 부모가 동시에 콜레라로 죽었다는
이유 때문에 람딘을 무척 동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그를 질투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람딘이 들판에서 일만하는 일꾼이니 집안에 들어와서는 안된다고 주장했다.
그는 식사를 하거나 주인의 방을 청소하러 매일 집안에
들락거렸던 것이다.
이제 람딘은 집안에 발을 들여 놓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자연히 농부의 아내가 할 일이 늘어났고,
그것이 그녀를 더욱 신경질적으로 만들었다.

시간이 흘러 이제 람딘은 열 아홉 살이 되었다.
그는 농부의 아내가 질투심이 강하다는 사실을 알고는 일부러
그녀를 멀리했다.
저녁을 먹고 나면 오두막집으로 돌아와 염소들을 돌보거나
집안을 수리하곤 했다.
이따금은 집 주변의 땅을 일구기도 했다.

어느 날 아침 람딘은 농장으로 가서 주인집의 마당에 앉아 있었다.
그때 수로차나가 눈물을 흘리며 집안에서 나오는 것이 보였다.
람딘이 일어나 그녀에게 뭐라고 말을 하려는 찰나에 농부의 아내가
남편의 손을 잡아끌고 뒤 따라 나오면서 이렇게 소리쳤다.

"이제 충분해요 !
나도 참을 만큼 참았어요 !
나는 더 이상 이 집에서 살 수가 없어요.
당신은 아무 말도 하지 않지만 마음 속으로는 언제나 딸의 편을
들고 있다는 것을 난 알아요.
저년은 언제나 내가 한 음식을 비난하고,
나에게 말도 하지 않고, 심지어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도 않아요.
그리고는 오로지 남자들을 만나러 읍내로 갈 생각밖에 하지 않으니,
저렇게 품행이 나쁜 년하고는 한집에서 살 수가 없어요.
저년은 창녀보다 나을 게 하나도 없어요 !"

농부의 참을성도 한계에 달했다.
그는 소리쳤다.
"닥쳐 !
당신은 언제나 아무 증거도 없이 저 애를 비난하고 있어 !"
그의 아내가 당장에 대들었다.
"어떤 증거를 원하지요 ?
저년이 밖으로 나오자 이 람딘 놈이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이지 않는단 말예요 ?
저년을 보자마자 저 놈은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어요.
만일 내가 뒤따라 나오지 않았다면 저들이 무슨 짓을 했을지
누가 알아요?
나는 뼈대있는 집안에서 자랐어요.
아버지가 엄해서 혼자서는 집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간 적이 없어요.
그런데 당신의 딸은 혼자서 읍내로 나가 하루 종일 사람들과
노닥거린단 말예요.
그런데도 저년이 순결하고 순수하다고 주장하시는 건가요 ?"

농부는 수로차나와 람딘을 바라보았다.
눈물이 그의 눈에서 흘러내렸다.
그는 이제 수로차나가 처녀가 다 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머지 않아 그녀는 결혼을 하여 이 집을 떠나갈 것이었다.
그는 생각했다.

"만일 내가 아내의 잘못이라고 주장한다면 아내는 집을 나가 다시는
안 돌아올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면 나는 두 사람 다 잃는 꼴이 된다."

침묵을 깨면서 그는 아내와 그의 딸이 더 이상 한 집에서
함께 살 수 없다고 말했다.
둘 중의 한 사람이 집을 나가야 했다.

"지금 당장 결정해야  돼요.
더 이상 어떤 변명도 듣고 싶지 않아요.
만일 당신의 딸이 아무 잘못도 없다고 한다면 둘이서 행복하게 사세요.
나는 친정으로 돌아갈 테니."

농부는 람딘을 바라보며 말했다.
"람딘,
자네의 아버지는 어렸을 때부터 나와 함께 일을 햇네.
그는 부지런하고 정직한 사람이었어.
그것은 자네도 마찬가지야.
난 자네가 내 딸 수로차나와 결혼해 주길 바라네.
내가 땅을 조금 떼어 줄 테니 행복하게 살 수 있을 걸세."

이 말을 듣고 그의 아내는 무척 기뻤으나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딸을 람딘에게 시집 보내는 것은 좋아요.
하지만 땅은 한 뼘도 줄 수가 없어요.
옛날에 준 것으로도 충분해요."

농부가 말했다.
"그렇다면 수로차나와 람딘이 결혼하는 것은 찬성한다는거요 ?"
그녀가 말했다.
"그래요,
하지만 수로차나가 일단 이 집을 떠나면 영원히 떠나는 거예요.
람딘도 더 이상 이곳에서 일을 하면 안 되요.
난 저 녀석 얼굴은 보기조차 싫어요.
저 놈은 아침마다 개처럼 어슬렁거리며 와서는 집 뒤에 숨어
당신 딸의 얼굴만 훔쳐 본단 말예요.
어서 저 둘을 결혼시켜 나를 편안하게 해주세요."

그녀가 그렇게 터무니없이 화를 내고 질투를 하는 것이 못마땅했지만
더욱 화를 내는 것이 싫어 그는 그녀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날 수로차나와 람딘은 결혼했다.
친척도, 친구도, 이웃도 초청하지 않았다.
농부는 딸과 람딘이 그 오두막집에서 살게 되면 먹을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큰 자루에다 감자를 가득 담아
길 중간의 숲에 숨겨 놓고 람딘에게 그 자루를 가져 가라고
몰래 말했다.
그리고 수로차나의 어머니가 유산으로 남긴 옷과 보석들을
가방에 넣어 수로차나에게 그것을 가져 가라고 말했다.

온 식구가 식사를 하고 나서 수로차나와 람딘은 떠날 준비가 되었다.
수로차나는 어머니의 물건이 담긴 가방을 가지러 방으로 가보았지만
가방은 이미 그곳에 없었다.
사방을 찾아 보았으나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그녀는 아버지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고 그냥 행복한 마음으로
새 가정을 향해 출발했다.

수로차나의 아버지는 그들 두 젊은이를 몹시 사랑했는데,
이제 그 둘은 강제로 그에게서 영원히 떠나가고 있었다.
그는 그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물을 흘리며
배웅을 했다.
그의 아내는 기뻤다.
남편이 밤새 바깥에 서서 그들을 배웅하든지 말든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그녀는 집안으로 들어가 마치 전쟁에서 이긴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람딘은 길을 가다가 숲에 이르러 감자가 담긴 자루를 꺼냈다.
자루에는  두 사람이 최소한 보름 동안은 먹을 감자가
들어 있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완전히 어두워진 시각이었다.
불을 켤 준비도 안되어 있었고,
불을 지필 도구조차 없었다.
람딘이 유산으로 물려받은 것은 요리하는 남비 하나 뿐이었다.
그것은 벽에 걸려 있었는데 부모가 죽은 이후로
너무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아 거미줄과 먼지가 가득했다.

오두막집에는 염소가 우글거렸다.
사실 그 오두막집은 염소들이 주인이었다.
염소들이 모든 장소를 차지하고,
람딘은 여름 동안 거의 대부분을 바깥에서 잠을 잤다.
이제 그는 결혼한 남자였으니 집이 필요했다.
그날 밤은 대충 잠을 잔 뒤 이튿날 아침,
수로차나는 일찌감치 일어나 염소를 오두막집 밖으로 몰아 내었다.
그리고 구석구석 청소를 한 뒤에 실내 한복판에
불을 지폈다.
그리고 나서 감자를 약간 구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람딘은 오두막집이 완전히 탈바꿈한 것을 보았다.
감자를 먹고 나서 그가 말했다.

"수로차나,
우리는 이제 하루 종일 무엇을 하며 보내지 ?
나는 더 이상 당신 아버지의 농장에서 일을 할 수도 없고,
여기서는 할 일도 없어."

그는 불안에 휩싸여 말했다.
"보름 동안은 이 감자로 먹고 살 수가 있지만,
그 다음에는 어떻게 하지 ? "
수로차나가 말했다.
"이 감자는 먹을 것이 아니에요.
이것은 나의 아버지에게서 받은 유일한 재산이에요. "

그녀는 그에게 염소를 팔아 음식을 사오라고 말했다.
하지만 람딘은 사고 파는 것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했다.
그래서 수로차나는 그에게 숫염소 몇 마리를 고르게 한 뒤
함께 읍내로 갔다.
그것은 람딘이 생전 처음으로 하는 시장 구경이었다.
그는 수많은 군중들과 이런저런 물건을 사고 파는 상인들을
보고 매우 흥분했다.
장사에 소질이 있는 수로차나는 한 장소에 염소를 데리고
앉아 있고,
람딘은 돌아다니며 시장을 구경했다.
그가 돌아와 보니 염소가 다 팔린 뒤였다.
수로차나는 좋은 값에 염소를 팔 수가 있었다.
그들은 그 돈으로 옷과 음식과 그릇들을 사 가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이제 람딘은 자신이 할 일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염소 우리를 새로 만들고,
땅도 일구어야 하고,
거름으로 쓸 염소 똥도 모아야 했다.
일할 생각을 하니 그는 신이 나서 잠이 오지 않았다.

아침 일찍 일어나 그는 땅을 일구기 시작했다.
그는 체격이 좋았으며,
농사의 경험이 풍부했다.
이제 감자 싹을 심을  시기였다.
그래서 둘은 열심히 일했다.
그 땅은 여러 해 동안 경작을 하지 않고 묵혀 있었으며,
염소 똥이 수북히 쌓여 있었다.
수로차나와 람딘은 땅을 깊이 파고 돌멩이를 모두 치워냈다.
이들은 보름 동안 열심히 일을 해서 감자를 심을 수 있도록
땅을 바꾸었다.
이제 또다른 할 일은 아주 빨리 자라는 염소들을 위해
우리를 만드는 일이었다.
수로차나는 필요할 때면 돈을 빌려줄 읍내의 사람들을 몇 명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여섯 달이 지나자  감자 수확을 할 준비가 되었다.
감자를 캐보니 알이 굵고 수확이 대단했다.

감자를 팔아 수로차나는 그동안 빌려 쓴 돈을 모두 갚고도 많은 돈을
저축할 수 있었다.
그 다음에 그들은 경작하지 않고 있는 땅을 더 일구었다.
매년 수확은 늘어만 갔고,
그들의 감자 사업도 커져갔다.
그들은 매우 부자가 되었다.

농부들은 람딘이 3년만에 땅을 두 배로 늘린 것을 알고는 다들 놀라워 했다.
게다가 읍내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를 신뢰했으며,
언제라도 그를 도와줄 자세가 되어 있었다.

수로차나의 계모도 그들이 잘 산다는 소리를 듣고 질투심이 솟았다.
그녀는 남편이 자기 몰래 딸에게 감자 수확을 빼돌려 주고 있는
것이라고 의심했다.
왜냐하면 손바닥만한 작은 땅에서 그렇게 많은 양의 감자를
수확한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어느 날 남편이 쉬고 있을 때 그녀는 가까이 다가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의 딸이 감자 농사를 해서 돈을 많이 벌었다는 소문을 들었어요.
3년만에 당신이 번 것만큼 벌었대요."

농부가 말했다.
"아,  그 소문은 진짜요.
그들은 정말 부지런한 일꾼들이지.
당신도 내 딸이 장사에는 전문가라는 사실은 알지 않소.
그 애가 파는 감자는 다른 사람들 것보다 훨씬 비싸게 팔린다오.
감자의 맛이나, 모양이나, 크기에 있어서 그애들의 감자를
능가할 감자가 없지.
자연히 고객들이 그애들의 감자를 먼저 사기 마련이니
못 팔아서 썩는 감자도 없고 말이오.
게다가 그애들은 남들보다 훨씬 먼저 감자 수확을 해서
시장에다 판다오.
내 생각엔 그곳이 다른 곳보다 따뜻하고,
또 필요할 때면 언제나 물을 끌어다 쓸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수확이 남보다 빠른 것 같소. "

그의 아내는 그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지만,
믿는 것처럼 가장해서 말했다.

"그애가 잘 산다니 나도 기뻐요.
어째든 그애는 내 딸이고 한 식구 아니겠어요 ?
나도 그애의 행복을 빌어요. "

농부는 이제 아내의 마음이 바뀐 것을 보고 너무나 기뻐서 말했다.
"세상은 참으로 공평한 법이오.
우리는 그애들에게 아무 것도 준 것이 없는데,
보시오, 지금 그애들은 모든 것을 다 갖게 되지 않았소 ?
내년쯤엔 그애들은 새집을 지을 거요.
언젠가는 우리가 그애들을 초대할 날이 있겠지. "

마음 속으로 울화통이 터졌지만 미소를 지으며
그의 아내는 말했다.
"아, 그래요.
언젠가는 우리도 그애들의 새집을 방문할 날이 있겠지요. "

이제 그녀의 남편이 딸에게 매년 감자 수확을 나누어 주고 있다는
 의심이 더욱 짙어졌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녀는 자기의 방으로 갔다.

바로 그날 밤,
남편이 깊이 잠든 틈을 타 그녀는 밖으로 나갔다.
그녀는 대단히 화가 나 있었고,질투 때문에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수로차나를 지상에서 영원히 제거해 버려야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잘못했다가는 람딘에게 붙잡혀 매를 맞을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그녀는 다른 수단을 써서 그들을 없애 버리려고 마음 먹었다.

한밤 중에 그들이 사는 곳으로 찾아간 그녀는 그들의 오두막집과
염소 우리에 불을 지르고 재빨리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오두막집과 염소 우리는 나무와 지푸라기 따위로 지어진 것이었기 때문에
화약고처럼 활활 타버렸다.
염소들은 전부 타 죽었다.
하지만 람딘과 수로차나는 불타는 오두막집에서
간신히 빠져 나올 수가 있었다.
몸에는 겨우 속옷만을  걸친 상태였다.
다른 모든 것은 다 불에 타버렸다.
씨감자로 남겨둔 것까지 불타 버렸다.


모든 것이 불타 버린 것을 보고 람딘은 허망해져서 바위에 앉아
울음을 터뜨렸다.
수로차나도 슬프긴 마찬가지였지만 용기를 내어 말했다.

"이제 여기에 우리한테 남은 게 뭐죠 ?
우리 다른 곳으로 가서 전부 다시 시작합시다.
밀림 속에는 성자(聖者)들이 많이 살고 있는데,
그들은 과일과 나무 뿌리와 열매를 먹고 산대요.
잠은 동굴 속이나 나무 아래서 자고,
아무 것도 소유한 것이 없으면서도 아무 걱정이 없이 산대요.
참으로 행복할 거예요.
우리 그렇게 사는 것이 어때요 ? "

람딘도 찬성했다.
"우린 이제 아무 일도 할 수가 없어.
살 곳도 없고, 염소도 다 죽었어.
먹을 것도 ,돈도 없고 ,심지어  씨감자마저 불타버렸어.
모든 것이 사라졌어 !
게다가 당신의 아버지도 우리를 농장에서 일하도록 해 주지 않을 거야.
나로서는 원래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고
언제나 힘든 일을 하며 살아왔기 때문에
숲 속의 나무 밑이나 동굴 속에서 사는 것이 하나도 두렵지 않아.
하지만 당신은 늘 풍족한 생활을 해왔어.
필요한 것은 언제나 구할 수 있었어.
그런데 이제와서 당신이 도인(道人)들 같은 생활을 해낼 수 있을까
염려가 돼.
내 생각에는 당신의 아버지께서 틀림없이 당신을 받아들여 줄거야,
우리에게 닥친 상황을 잘 이해할 테니까.
하지만 나는 더이상 그곳에 갈 수가 없어.
당신의 계모는 당신보다 나를 훨씬 더 미워하니까.
그 여자는 나를 사람 취급도 하지 않을 거야 ! "

수로차나가 말했다.
" 지금은 과거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을 때가 아니에요.
누구나 환경에 적응하기 마련이에요.
산속의 성자들이라고 해서 전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에요.
개중에는 신발 없이는 생전 땅 한 번 딛지 않은 왕자들도 있어요.
그러니 아침해가 떠오르기 전에 그곳으로 떠나요.
이렇게 속옷만 걸치고 있다가 사람들 눈에 띄면 곤란하니까요. "

람딘은 더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산을 향해 떠났다.
수로차나가 그 뒤를 따랐다.
람딘의 오두맏집은 마을에서 십 리도 넘게 떨어진 외딴 곳에 위치해
있었다.
게다가 산등성이에 가려져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들에게
일어난 일을 알지 못했다.

몇 달이 흐른 뒤 수로차나의 아버지가 말했다.
" 수로차나의 소식을 듣지 못한 지가 꽤 되었어.
이따금 읍내에서 마주치곤 했었는데 통 나타나지 않아.
감자 수확 준비를 하느라고 바빠서 그런 것 같기도 한데,
걱정이 되는군.
아무래도 그애들이 사는 곳을 방문해 봐야겠어 ."

그의 아내가 말했다.
"그애들은 가난하지 않아요.
이제 돈을 충분히 벌었기 때문에 더 이상 당신을 만나지 않아도
될 거예요.
그리고 당신이 나 몰래 그애들에게 많은 감자를 주었으니까요 !
아마 지금쯤 새집을 짓느라고 부산할 거예요.
나는 이제 화가 나거나 질투심이 생기지 않아요.
우리 둘이서 그애들을 방문하면 좋을 거예요. "

그의 아내가 질투심이 사라졌다는 말을 듣고
농부는 기쁨으로 가득 차서 말했다.
"여보,
언젠가는 당신의 마음이 변해 수로차나를 딸자식으로
받아들일 것이라고 나는 늘 믿었소.
마침내 그 때가 왔소.
내일 우리 함께 그애들을 방문합시다.
그리고 그애의 어머니가 물려 준 옷과 보석을 그애에게 갖다 줍시다.
결혼식날 내가 그애더러 가져 가라고 일렀는데,
어쩌다가 잊고 간 모양이오.
며칠 전 당신의 옷장을 보니 그 안에 그 보따리가 들어 있읍디다 ."

그의 아내가 말했다.
"아니, 내가 없는 사이에 내 물건을 뒤졌군요 ! "
그녀는 다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죠.
그것들을 그애에게 돌려 주는 것이 저도 기뻐요.
저는 그 물건들이 하나도 필요 없어요.
어떻게 해서 그 보따리가 내 옷장에 들어가 있는지 저도 모르는 일이에요."

이튿날 아침 그들 두 사람은 수로차나와 람딘을 만나러 갔다.
그런데 도착해서 보니 아무 것도 없고,
몽땅 타버린 재와 뼈만 남아 있었다.

농부가 말했다.
"도대체 이게 어찌된 일일까 !
집이 몽땅 타버렸어.
이 뼈들을  봐 !
그애들이 불에 타 죽은 것이 틀림없어 !
그런데도 마을의 어느 한 사람 알지 못했어 !

뼈들을 보자 그의 아내는 자신이 전투에서 승리했다고 믿었다.
두 명의 원수가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땅바닥에 엎드려 눈물을 흘리며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남편도 고통을 이길 수가 없어 울음을 터뜨렸다.

"수로차나,
나는 너에게 준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늘 너를 가슴 아프게만 했어.
너의 어머니는 너를 잘 돌봐 달라고 유언을 했는데,
나는 너에게 사랑도 행복도,
심지어 너의 친어머니가 물려 준 보석조차 주지 못했어.
이 못난 애비를 용서해 다오. "

그의 아내는 분노로 속이 뒤틀렸지만 여전히 동정을
표시하면서 말했다.
" 여보,
당신은 그래도 딸에게 할 만큼 해 주었어요.
당신의 도움으로 그애들은 부자가 되었어요.
당신이 감자 수확을 나누어 주지 않았다면 그애들은 그만큼
돈을 벌지 못했을 거예요.
하지만 당신은 누구의 운명도 바꿀 수가 없어요.
당신은 전처를 사랑하고 모든 것을 다 해 주었지만 생명을 구하지는
못했어요.
같은 식으로 당신은 수로차나와 람딘에게 모든 것을 다 해주었지만 ,
그들은 불에 타 죽을 운명이었어요.
자 , 이제 집으로 돌아갑시다.
슬퍼한다고 해서 그애들이 살아 돌아오지는 않아요.
모두가 신의 뜻이에요.
그것을 받아들여야만 해요 . "

농부는 그녀가 진실로 슬퍼하는지,
아니면 아직도 질투를 하는지 분간을 하지 못했다.

"아,
이제 그애들은 가버렸으니,
이것으로 그애들에 대한 나의 애착도 끝이오.
나는 그동안 여러 가지 이유 때문에 그애들에게 해주고 싶은 것을
해주지 못해 왔소.
이제 나는 오직 한 가지만 가슴이 아플 따름이오.
수로차나의 물건을 돌려 주지 못했다는 것이오.
평생 동안 나는 그애에게 빚을 진 채 살아가야 할 것이오."

그들은 서로 다른 감정상태를 하고서 농장으로 돌아왔다.
아내는 남편이 더 이상 수로차나와 관계를 맺을 수 없게
된 것이 기뻤고,
남편은 이생에서는 딸을 두 번 다시 만날 수 없게 된 것이 슬펐다.

이튿날 농부가 읍내로 나가자 소문이 당장에 퍼졌다.
사람들은 여러 가지 각도에서 그 사건을 분석했다.
어떤 이는 공처가인 남편을 비난했고,
어떤 사람은 수로차나를 못살게 군 그의 아내를 욕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서 그 집에 화재가 났는지에 대해선
아무도 알 수가 없었다.
감히 그것이 농부의 아내가 한 짓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녀는 늘 집에만 붙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수로차나와 람딘은 살 장소를 찾아 산을 올라갔다.
나무 아래서도 살아보고,
바위 밑이나 동굴 속에서도 머물러 보았지만
어디서도 편하지가 않았다.
이따금 람딘은 장소도 찾지 못하고 하루 종일 일도 못하게 된 것에
대하여 절망에 빠지곤 했다.
하지만 그때마다 수로차나가 언젠가는 그들이 탄 배가 항구에
정착할 것이라고 위로해 주었다.

수로차나 자신은 그렇게 밀림 속에서 헤매야 할 절확한 이유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면 마을이나 읍내에서도 쉽게 살 곳을 마련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 두 사람은 젊고 건강했으며,
일자리를 구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은 이전의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하나도 생기지 않았다.
밀림 속에서 살아야 하는 뚜렸한 목적도 없었지만,
수로차나는 밀림 속에서 살아가는 성자들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 말에 의하면 ,
동물들이 그들의 친구들이고,
새들이 무릎에 날아가 앉기도 한다는 것이었다.
그년는 그런 식으로 살아가는 자신들의 모습을 눈앞에 그리고 있었다.

람딘은 완전히 다른 생각이었다.
그는 식량을 자급자족하고, 사냥을 하고,
밀림의 여러 장소로 옮겨 다니는 집시들처럼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래서 그들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따라 장소를 물색했지만,
생각이 다르기 때문에 한 사람이 마음에 들어 하면
다른 사람이 반대했다.
마침내 그들은 장소 하나를 정했다.
그곳은 넓은 동굴이었다.
그다지 깊숙하지는 않았지만,
코끼리 두 마리가 편안히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큰 동굴이었다.
한쪽에는 폭포가 있고 건너편에는 평지가 있었다.
평지에는 그늘을 만드는 나무도 없어서 늘 햇빛이 내리쬐고 있었다.

람딘은 그 장소가 무척 마음에 들어,
그 평지에 감자를 심고,
폭포의 물을 끌어 가꾸고, 시장에 감자를 내다 팔 방법 등을
궁리하기 시작했다.
수로차나는 그 장소가 매우 평화롭고 따뜻하며 맑은 물이 있어서
좋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마른 풀줄기를 모아 동굴 안에 두툼한 침대를 만들었다.
식량으로는 무화과나 야자, 살구 , 단감자 등 야생의 과일이
여러 종류 있었고,
먹을 수 있는 나무뿌리나 풀뿌리도 많았다.
그리고 밀림 속에는 진기한 약초들이 많이 널려 있었다.

한 달 동안 그들은 사람이라곤 전혀 구경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들이 약초를 캐고 있는데
한 남자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 약초를 모아 나한테 주면 음식과 옷을 가져다 주겠소.
당신들이 모아 놓은 약초를 가지러 한 달에 두 번씩 이곳으로 오리다."

람딘이 즉시 말했다.
"좋소. 우리한테 음식을 가져다 준다면 이 약초를 주겠소.
이곳엔 약초가 사방에 널려 있소.
우리는 여기서 가까운 동굴에 살고 있다오."

남자는 매우 기뻤다.
거의 공짜로 약초를 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좋습니다.
내일 당장 당신들 한테 필요한 물건들과 음식을 가지고 다시 오겠소.
그런 다음부터 약초를 모아도 좋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약초를 제공해 주면 안됩니다."

람딘이 말했다.
"아, 그 점에 대해선 염려할 필요가 없소.
우리는 오직 당신한테만 약초를 줄 것이오."

수로차나는 그 남자가 매우 싼 값에 약초를 가져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라면 읍내로 그 약초를 가지고 나가 훨씬 높은 가격에 팔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람딘에게 그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람딘이 그 약초가 얼마나 값비싼 것인가를 알면 또다시  돈을 벌려는
욕망에 사로잡힐까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그 대신 수로차나는 이렇게 말했다.
" 보세요,
신께서 얼마나 자비로우신지.
이 밀림 속까지 우리를 위해 이렇게 음식을 보내 주시잖아요.
이제 우리는 읍내로 일을 하러 가거나 감자나 염소를 팔러
가지 않아도 먹고 살 수 있게 되었어요.
시기에 맞춰 감자를 심거나 거둘 걱정을 할 필요가 없어요.
밤이 되어 염소가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걸 걱정할 필요도 없구요.
늘 자유를 누릴 수가 있게 되었어요.
매일 조금씩 약초를 모아두면 보름 뒤에는 먹을 것을 등에 진 남자가
나타날테니까요. "

이런 식으로 일 년이 지났다.
그들은 약초를 가져 가는 그 남자말고는 사람의 얼굴을
구경하지 못했다.
그들은 사회와 세상으로부터 떨어져 평화로운 마음 상태에서
살아가고 있었다.
람딘의 마음도 이제 변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감자 농사를 짓거나,
돈을 벌거나, 마을로 돌아가 새 삶을 시작할 욕심이 없어졌다.
심지어 약초 상인에게 약초를 모아 주는 일에도 그다지 흥미가 없었다.

어느 날 수로차나가 말했다.
"이 약초가 얼마나 비싼 것인지 당신은 알기나 해요 ?
이 약초를 시장에 내다 팔면 감자보다 훨씬 비싼 값을 받을 수가 있어요.
약초 판매 사업을 시작하고 싶지 않으세요 ?
일 년 만에 우리는 전처럼 다시 부자가 될 수 있을 거예요."

람딘이 말했다.
"아, 나는 그 생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없어.
나는 이제 어떤 인간의 얼굴도 보고 싶지 않아.
이곳에서 나는 행복해.
전에 나는 밀림 속에서의 생활이 당신한테는 매우 힘들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
이제 보니  당신은 이런 생활이 싫증이 난 것 같아.
여보,
당신이 원할 때면 언제든지 당신의 아버지가 사는 곳으로
돌아가도 좋아.
하지만 이제 나는 이곳을 떠날 수가 없어."

수로차나가 말했다.
"좋아요.
나 역시 마을로 되돌아가고 싶지도 않고,
사람을 만나고 싶지도 않아요.
그러니 이제 약초 상인을 그만 오라고 합시다."

람딘이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러 해가 지나고,
그들 둘이는 여전히 같은 동굴에서 밀림의  고요와 침묵을
즐기며 살았다.
그들은 이제 서로에게 말을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의 생각을 잘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의 모든 대화는 마음의 파장을 통해 행해졌다.
바로 옆에 앉아 있거나,
육체적으로 먼 곳에 떨어져 있어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수로차나는 동굴 밖으로 나가 식량에 쓸 나무 뿌리를
캐고 있었다.
람딘은 동굴에 남아 있었다.
그때 한 떠돌이 승려가 살 곳을 찾아 근처를 배회하다가
동굴을 발견했다.
동굴 속으로 들어간 그는 긴 머리에 수염이 덥수룩한 남자가
이미 동굴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승려는 입구에 말없이 서서 그 남자가 자기를 쳐다보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 남자는 자기를 쳐다보는 대신에 마치 누군가에게
말을 하듯이 입술을 움직이는 것이었다.
승려는 그 자리에 있지도 않은 누군가에게 말을 하는 것을 보고
그 남자가 미친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승려는 잠시 쉬어 가려고 동굴 바닥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람딘은 여전히 말을 하고 있었다.

승려는 당황해서 이렇게 물었다.
"여기에 아무도 없는데 도대체 누구한테 말을 하는 거요 ?
당신 미쳤습니까 ? "

람딘은 공손하게 대답했다.
"아, 나는 지금 내 아내에게 말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내 아내는 지금 산 저쪽에서 저녁 식사에 쓸 나무뿌리를 캐고 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손님이 한 분 오셨으니 뿌리를 더 캐어
오라고 일렀습니다. "

승려가 말했다.
"나는 여태까지 벽을 바라보고 '이것은 나의 형제요,누이요,아내이다' 라고
말하는 미친 사람들을 많이 보았소.
당신같이 미친 사람하고는 더 이상 같이 있을 수가 없소."

그는 당자에 자리에서 일어나 동굴을 떠났다.
건너편 산 쪽으로 가던 그는 실제로 한 여성이 나무뿌리를 캐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간 그는 그녀 역시 그곳에 없는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들이 모두 미친 사람들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렇기 때문에 이 깊은 동굴 속에서 살고 있는 것이라고
짐작했다.

"아, 부인.
도대체 누구에게 말을 하고 계십니까 ?
이곳에는 아무도 없는데요."

여자는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 당신은 내 남편과 함께 동굴에 있다가 오셨지요 ?
남편이 나더러 손님이 왔으니 뿌리를 더 캐라고 말하더군요.
당신이 급히 동굴을 떠나자 남편도 당신을 뒤따라 나오다가
그만 발에 가시가 박혔답니다.
지금 남편은 그 가시를 빼내려고 애를 쓰고 있는데,
내가 가서 빼줄 테니 가만히 있으라고 말했습니다."

동굴로 서둘러 되돌아 온 승려는 람딘이 실제로 발에 박힌 가시를
빼내려고 애쓰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는 이 모든 일이 너무나 놀라웠다.
그는 람딘에게 존경의 절을 올린 다음  이렇게 말했다.

"내가 갖고 있는 옷핀으로 가시를 빼어 드리겠습니다."

그가 가시를 빼고 있는 동안에 수로차나가 나무뿌리들을 들고 와서
동굴 한쪽 구석으로 앉았다.
그들 두 사람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승려는 그들이 침묵 속에서도
대화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냐하면 람딘이 일어나 밖으로 나가더니 수로차나가 성급히 오느라고
도중에 떨어뜨린 나무뿌리들을 주워 왔기 때문이다.
그러자  그녀는 나무뿌리들을 전부 모아 물로 씻으러 밖으로 나갔다.
그녀가 돌아오자 그녀의 남편이 승려에게 나무뿌리 몇 개를
먹으라고 주었다.
승려는 공손히 나무뿌리를 받고 나서 말했다.

"당신들의 발 앞에 엎드려 당신들을 저의 영적인 스승으로 모시겠습니다.
조금 전의 저의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어떻게 해서 그렇게 초자연적인 힘을 얻게 되었는지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처음에 당신들을 보았을 때 나는 당신들이 미친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당신들이 정말로 멀리 떨어져 있으면서도
대화가 가능한 것을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

람딘이 겸허하게 말했다.
"우리는 이 동굴에서 여러 해 동안을 살았습니다.
벌써 오래 전 일인데,
어느 날 내 아내는 동굴 속에 앉아 있고,
나는 바깥의 어디엔가 앉아 있었습니다.
그때 아내는 자신의 머리 속에서 어떤 소리가 울리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 소리는 더욱 커졌습니다.
내가 동굴 속에 들어갔을 때 그녀는 육체에 대한 의식이 없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그녀에게 달려가 그녀가 아직 살아 있는지 살폈습니다.
그런데 내 손이 그녀의 몸에 닿는 순간 내 머리에서도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 소리는 점점 커졌고,
나는 그녀의 곁에 눈을 감고 앉았습니다.
그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나도 모릅니다.
그런 상태로 얼마나 오랫동안 앉아 있었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의식을 되찾았을 때 우리는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평화를 느꼈습니다.
바로 그날부터 우리는 이 동굴에 앉아서 머리 속에서 시작해 척추를 타고 온 몸
구석구석으로 퍼져가는 그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그 소리는 피부의 숨구멍을 통해 동굴 전체에
울려퍼졌습니다. "

승려가 깜짝 놀라며 소리쳤다.
"나다 요가(Nada Yoga 정교한 음향에 집중하는 수련) 이다 !
이것은 요가에서 말하는 내면의 소리이다.
당신들은 이제 최고의 경지를 획득하신 겁니다.
당신들의 육체는 이제 완전히 정화(淨化)되었습니다. "

그리고 나서 그는 그들의 발 아래 엎드려 절을 했다.

"저를 축복해 주십시오 ! "

그의 머리가 그들의 발에 닿는 순간 그 자신도 그 소리를 듣기 시작했고,
육신에 대한 의식을 잃었다.

한참 뒤에 승려가 의식을 되찾자 람딘은 겸허하게 말했다.

"이제 이 동굴은 당신의 것입니다.
당신은 내면의 소리에 자기 자신을 더 완벽하게 조화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가 다른 곳으로 가겠습니다.
우리 한테는 세상 전체가 동굴이고 밀림입니다. "

그리고 나서 그와 수로차나는 당장에 그곳을 떠났다.

시간이 흘러 인구가 증가했다.
사람들은 물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경작을 시작했다.
몇몇 사람들이 농토를 구하러 왔다가 동굴 속에 앉아 있는
승려 한 사람을 보았다.
그날부터 그곳은 승려를 숭배하는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동굴은 이제 큰 사원으로 변했고,
승려는 거대한 건물 속에서 살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무도 람딘과 수로차나가 그 이후 어떻게 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그들은 아직도 눈에 보이지 않는 육체를 가지고
어디선가 살아가고 있을까 ?

"